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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과 고대사의 회복

by 귀뚫린종 2023. 12. 28.
고고학과 고대사의 회복
 

 Ⅰ. 성경 고고학의 출현

 아이적 뉴턴 경(Sir Isaac Newton)이 고대 왕국들의 연대기(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1728년 출판)를 집필할 때 그의 근본 자료는 성경과 그리스 및 로마 작가들의 고전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 성경의 역사적 부분에서 이끌어낸 그의 결론은 잘 검증되어서 오늘날까지도 거의 수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세속적인 고전 자료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고대사는 완전히 오류투성이었다. 뉴턴에 의하면 세삭, 곧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한 성경의 시삭(Shishak)이 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침략하였을 뿐 아니라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넜으며 또한 인도로 진격하여 갠지스 강가에 승전비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시삭은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는 앞서 언급한 어떤 출정에도 나서지 않았다. 뉴턴은 대왕 라암세스(라암셋)를 BC 13세기가 아닌 9세기의 인물로 보았으며, 기제(기자)에 대피라미드들을 건축한 케옵스, 케프렌, 뮈세리누스 등을 라암세스 이후의 인물로 기록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애굽 제4 왕조에 속했던 이들이 라암세스보다도 여러 세기 이전의 제왕들이었으며, 그들이 세운 피라미드들이 이미 모세 시대에도 그 건축자들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애덤 클라크(Adam Clarke)와 같은 19세기 초의 성경 주석가들은 아이적 뉴턴 경과 동일한 곤경에 처했었다. 고대 기록들에 의거하여 바사 이전 시기의 성경 역사를 조명하려고 할 때, 그 기록들이 제시하는 역사적 상황과 배경들 중 어느 곳에 성경의 기록들을 놓아야 할 것인지 불분명하였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대체적으로 잘못 인도하는 것들이었다. 19세기 초의 고대사 연구가들이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애매 모호하고, 왜곡(歪曲)되고, 오류투성이인 연구 자료들밖에는 없었으며, 그것도 식별해낼 수 없는 크나큰 공백기간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설상의 인물도 역사적 인물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고대 세계의 참된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고대사에 대해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진 오늘날까지도 고대 국가들 사이에 뒤섞여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으며, 고전작가들이 기술한 인물들과 사건들을 모두 확인해내는 일 또한 아직은 불가능하다.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이 제시했던 고대의 자료들은 근래 발견되고 있는 증거들로 인해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고대 문필가들이 제공한 수많은 정보들이 오해 또는 전적인 오류 상태 가운데 있음이 드러났을 때, 학자들 사이에서는 모든 고대 문헌들에 대한 회의주의가 일기 시작하였다. 한 예를 든다면, 호머의 일리아드(Iliad)를 전설로 간주하였을 뿐 아니라 하인리히 쉴리만(Heinrich Schliemann)이 트로이 시를 발굴하여 그 도시의 존재를 입증하기까지는 트로이 시의 존재 자체도 부인했었다.
 수많은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와 같은 고대 문헌에 대한 회의주의가 성경의 저술들에까지 파급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고대 역사에 관한 성경의 기록들과 부조(父祖), 선지자, 사사, 왕들에 대한 기사들이 그리스와 라틴의 작가들이 전승해 준 여느 고대인들의 경우처럼 대부분 전설상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세기에 명성을 떨쳤던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은 성경 기사들의 정확성을 크게 의심하였기에 열렬한 비평가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이런 태도는 크게 달라졌다. 지금은 구약성경과 그 기사 및 교훈에 대하여 몇십 년 전보다도 훨씬 많은 존경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근동지역에서의 발굴 결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고고학을 통해 고대 문명이 백일하에 그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구약성경은 역사적 신빙성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고대 세계의 최고 산물들과 비교해 볼 때 범위, 영향력, 높은 이상 등에서 그 독특성이 확증되었다. 성경의 영감성을 인정하지 않는 역사학의 권위자조차도 이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구약성경은 종교적 제재 조치로 그 본문을 보호했던 때보다도 오늘날 역사적 자료로서 판단을 받을 때 더 높은 평판을 얻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역사가는...성경을 근대적 입장에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는 창세기를 랑케(Ranke)와 대조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애굽과 앗수르의 산물과 비교해야 한다. 그 시대에 비추어 판단해 볼 때 유대인의 문학은 범위와 영향력에 있어서 독특하다”
(James T. Shotwell,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History, 80).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누구든지 신명기 5장부터 11장까지 읽고 나서 이것을 고대 문명이 절정에 달하기 이전의 나머지 문학작품들과 비교해 본다면 (신명기 기자의) 시야가 진실로 고귀하였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다”(상동 92).
 매몰된 고대 지역을 광범위하게 탐사하고 발굴해냄으로써 우리 눈앞에 고대 문명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고대사를 재구성하고 성경 기사를 참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오랫동안 잊혀진 채 내려온 애굽과 헷의 상형 문자(象形文字, hieroglyphs), 수메르와 바벨론의 설형 문자(楔形文字, cuneiform),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고대 거주인들이 갖고 있던 알파벳 문자 등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년간이나 죽어 있던 언어가 부활해서 문법과 어휘까지 확립하였다. 애굽의 모랫더미와 서부 아시아의 폐허 속에서 수천 년간이나 숨겨져 간직되어 온 문학적 자료들이 풍부하게 발견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현대학자들은 고대 민족들의 종교와 문화뿐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상당히 폭넓게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사료나 성경에는 언급되지만 그 위치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었던 라기스, 하솔, 므깃도, 니느웨 등 수많은 도시들을 재발견, 발굴하였다. 폐허가 된 신전들과 궁전들을 발굴하였고, 학교, 도서관, 묘지 등을 발견하였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비밀들이 벗겨졌으며, 성경 인물들이 살았고 거룩한 글들이 산출된 고대 세계에 관해 급속히 축적되는 지식의 증가에 공헌하였다. 지나간 한 세기 반 동안에 고대 동양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하여 엄청난 자금이 사용되었으며, 지식인들은 건강과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이 일에 종사하여 방대한 양의 발굴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발전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 보인다. 발견된다 해도 하등의 유익이 없고, 성경의 신뢰성을 확립할 필요도 없었던 지난 수천 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이 모든 자료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어찌 달리 해석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말씀의 확실성과 거룩한 역사의 진실성을 보여 줄 필요가 가장 절실히 요구될 때 이 모든 자료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증거하는 데 이것들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하게 될 때까지 보존하신 것이다. 산 증인들이 주님과 진리를 증거하지 않고 잠잠할 때 돌들이 소리치리라고 예언하셨던 예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성지 여러 곳에서의 고고학적 노력에 관한 이 놀라운 발전사를 소개함에 있어서, 아마도 당대 동양학의 최고 권위자인 윌리엄 F. 올브라이트(W. F. Albright)로부터의 몇 인용문들은 성경 연구에 있어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얻은 중대한 유익과 또한 성경의 기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학계에 이르러 온 중대한 변화를 잘 나타내 보여 줄 것이다. 193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인근 지역에 대한 지난 세기 동안의 고고학적 연구로 성경의 역사적, 문학적 배경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전적으로 변모하였다. 그것은 더 이상 절대적으로 독립된 과거의 유물이나 그 환경과 하등의 관련도 없는 하나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매년마다 더욱 잘 알려지고 있는 환경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립하고 있다. 고대 근동지방의 배경 속에서 파악할 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애매모호하던 점들이 이제 분명해졌으며, 우리는 히브리 사회와 문화의 유기적 발전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문화적 걸작품인 동시에 종교적 문서로서 성경이 갖고 있는 독특성은 감소되지 않았고,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한 경건한 신앙을 파괴하는 그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The Archaeology of Palestine and the Bible, 127).
 올브라이트는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처럼 독단적이고 회의적인 고등비평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발견물들에 관해 상당한 분량에 걸쳐 논하고 있다. 고등비평가들은 성경 속에 전설, 민화, “종교를 빙자한 사기”로 일컫는 신화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올브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성경 속에서 사기적 날조와 고의적 위조를 찾아내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서 보수주의 학자인 우리들이 열렬하게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믿는다. 동시에, 그럴싸한 신화와 천박하게 위장한 이교주의를 성경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대해서 그들이 지극히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상동, 176).
 위의 글을 기록한 이래 성경의 신빙성과 본문의 정확성을 아주 세밀하게 확증해 주는 고고학적 발견들이 더해졌으며, 그것들 중 어떤 것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이 방대한 양의 새 자료들을 돌이켜 보면서 올브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고학적 발견을 힘입어 최근에는 성경 신학이 크게 부흥하고 있다. 고고학이 성경 본문과 배경에 대해 새로운 자료들을 통해서 풍부하게 조명하기 때문이다....신구약에 대한 과거의 접근 태도는 새로운 고고학적 자료들 때문에 수정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을 재발견하게 됨으로 성경적 신앙을 새롭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초기시대의 정통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는 사실이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학문적 고집이나 신용할 수 없는 신정통주의가 우리의 눈을 살아 있는 성경적 신앙에서 떼어놓도록 결코 허용할 수 없다”(“The Bible After Twenty Years of Archaeology”, Religion in Life, vol. 21, Autumn, 1952, 550).

 Ⅱ. 고대 애굽의 부활

 애굽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고대 문명이 찬란하게 꽃피었던 나라, 지도상에서 뱀의 모습을 한 평균 8킬로미터 이상의 폭과 800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는 길고 비좁은 강 유역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한때 요셉이 총리로서 치리하였으며, 율법을 전한 모세가 교육을 받았던 이 땅은 매우 특이한 지역이다. 99퍼센트의 인구가 4퍼센트의 땅에 밀집되어 있다. 나머지는 사막이다. 헤로도투스(Herodotus)는 “애굽은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말하였다. 협소하나 비옥한 그 땅은 나일강에 생명을 걸고 있다. 전혀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년 나일강이 범람하는 것에 의존한다. 지극히 건조한 기후 덕분에 수많은 건물과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분해되어버렸을 물질들이 엄청나게 많이 보존되어 왔다. 더욱이 고대 국가들 중 애굽은 건축술에 가장 뛰어났으며, 피라미드, 방첨탑(方尖塔, obelisk), 신전과 같은 매력적인 석조물들이 수천 년간 그대로 보존되어 고대 애굽인들의 탁월한 기술을 아직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경 고고학, 특별히 애굽 고고학이 탄생한 것은 1798년이다. 당시에 애굽 정벌에 나선 나폴레옹은 학자, 건축가, 예술가 등을 동반하여 고대 애굽 유물에 관하여 연구하고 기록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들은 놀라운 활약을 벌여 연구 결과를 24권의 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들은 아직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 프랑스 학자들이 기록한 많은 기념비들과 명각(碑文)들은 그 이후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1799년 프랑스 군대의 최고 발견물은 로제타 돌(Rosetta Stone)이다. 이 돌은 애굽인들의 신비로운 상형 문자를 해독(解讀)하는 열쇠가 되었다. 이 검정 현무암 석판은 영국이 전리품으로 획득하여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가장 가치 있는 유물로 소장하였다. 이 석판에는 헬라어, 민용 문자(후기 애굽의 흘림 글자), 상형 문자(초기의 그림 글자) 등 세 가지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학자들은 판독이 가능한 헬라어 부분을 가지고 나머지 두 문자를 해독하는 일에 즉시 착수하였다. 1802년에 스웨덴 출신 외교관 아케르블라드(°Akerblad)가 민용 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고, 1819년에는 영국인 의사 토머스 영(Thomas Young)이 여러 해에 걸친 노력 끝에 몇 상형 문자의 올바른 독법(讀法)을 발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2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의 총명한 청년 쟝 프랑솨 샹폴리옹(Jean Francois Champollion)이 해독법을 마련하였다.
 그때부터 애굽 문자를 읽을 수 있게는 되었지만 완전한 과학적 기초 위에 고대 애굽어를 재구성하는 데는 어먼(Erman), 시드(Sethe), 가디너(Gardiner) 등 수많은 학자들의 지대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샹폴리옹의 개척자적 업적이 이루어진 지 7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최초의 만족할 만한 애굽 상형 문자 문법책이 나왔고, 4,200페이지로 된 적절한 애굽어 사전이 나오기까지는 1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애굽 문헌들은 모음이 전혀 없이 수백 가지의 자음과 더불어 그림문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애굽학을 연구하는 학도들이 그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아직도 어려운 과업에 속한다. 그러나 세속적, 종교적 문학작품들과 역사적 증거들을 크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고대 애굽의 정치사와 종교사는 건전한 기초 위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적 연구활동과 손을 맞잡고 고고학자들의 현장 활동이 진행되었다. 19세기 전반기에는 탐사활동을 통하여 신전 명각들을 베끼고 고대 애굽의 유물이라면 눈에 띄는 대로 모두 기록하였다. 지면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탐사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1842~1845년에 렙시우스(Lepsius)의 지휘로 이루어진 대프러시아 탐사단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탐사단은 애굽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베끼고 기록하였다. 그 결과 12권으로 이루어진 기념집이 나왔는데 각 권의 크기는 덮었을 때 가로, 세로가 각각 76센티미터와 61센티미터에 해당하는 초대형 책으로, 이것을 능가할 만한 크기의 책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19세기 전반기에는 조직적인 발굴활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본토인들이 땅을 파헤쳐서 찾아낸 엄청난 양의 유물들을 유럽 제국의 대형박물관들에 팔았을 뿐이다. 이 기간 동안에 박물관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유물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애굽 정부가 고대 유물관리부를 신설하여 마리르트(Marirtte)를 책임자로 임명함으로써 전환기가 마련되었다. 그는 당시에 콥틱 사본을 찾던 도중 신성한 황소가 묻힌 채 보존된 신전인 세라페움(Serapeum)을 발견하는 행운을 잡았다. 마리르트는 거친 행동도 서슴지 않았으며 심지어 무력까지 동원하여 끈질기게 불법적인 도굴활동을 소탕해냈다. 악착스러웠으며, 결국 모든 발굴활동은 마리르트와 그의 부하들 손안으로 집중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기간 동안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고대 애굽의 보물들이 카이로 박물관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현재 카이로 박물관은 고대 애굽 예술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 되었다.
 31 년간의 마리르트 관리 기간 동안에 하나의 위대한 발견이 있었다. 3,000년 이상 상당수의 유명한 바로(Pharaoh)들을 안치시켜 놓았던 비밀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고대에 그들의 묘실이 도굴당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어떤 효심 있는 왕이 선대의 미라들을 모아서 상부 애굽 수도였던 테베 근방에 있는 서부 사막 골짜기 높은 곳에 인공으로 만든 동굴 묘실에 모셨다. 이 동굴에서 위대한 전쟁 군주인 투트모세 Ⅲ세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BC 15세기에 팔레스타인 전체를 정복한 사람으로서, 아마 이스라엘인들을 억압한 바로가 이 사람일 것이다. 헷족을 대항해 싸운 가데스 전투의 영웅인 라암세스 Ⅱ세, 12세기에 해양 민족(Sea peoples)이 침략하였을 때 애굽을 구출한 라암세스 Ⅲ세의 미라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유명한 군주들이 많이 나왔다. 제국을 호령하였으며 당대인들에게 신으로까지 경배를 받았던 이들은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카이로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속에 진열된 채 흘러간 세상적 영광과 권세를 침묵으로 인상깊게 증거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특별 전시실로 옮겨졌다.
 1881년에 가스통 마스페로(Gaston Maspero)가 고대 유물 관리부를 책임지게 되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외국 학자들과 연구기관들을 초청하여 애굽의 고대 유물을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발굴 작업도 허용하였다. 발굴물에 대하여는 수고와 희생의 대가로 공정한 분배가 약속되었기 때문에 과학 연구기관, 박물관, 정부들이 앞을 다투어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외국 학자들의 고고학적 연구에 대해 관대한 정책이 계속되자 애굽의 고대 문화와 역사는 엄청나게 많이 회복되었다.
 애굽 고고학에서 윌리엄 플린더스 페트리 경(Sir William Flinders Petrie)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1880년대에 청년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파헤치고 기록하고 모든 발굴물을 보존하는 일에 처음으로 조직적인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과학적 발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거의 60 년간 팔레스타인과 애굽에서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발굴활동을 하였으며, 단독으로 혹은 공동으로 고고학을 주제로 한 80권 이상의 책을 출판하였다.
 지면상의 이유로 188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모든 발굴 작업을 열거할 수 없다. 100개 이상의 피라미드를 조심스럽게 탐사하였으며 인접한 신전들을 발굴하였다. 수천 개의 왕릉과 평민들의 무덤을 파헤쳤으며, 그 내용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유럽과 미국의 주요 박물관으로 옮겼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놀랍고 가장 큰 인기를 독차지하였던 것은 1922년에 카터(Carter)가 투탄카멘 왕의 무덤을 도굴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 발견한 것이다. 이 지점을 발굴하기 위하여 카터는 여러 해에 걸쳐 70,000톤의 모래와 자갈을 치워야만 하였다. 이 무덤 속에는 수천 점의 보석, 가구, 기구, 무기, 그릇, 의복 등이 있었으며 내부를 정금으로 입혀서 왕의 시신을 모신 대리석 관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은 애굽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도록 했을 뿐 아니라 지난 100 년간의 모든 활동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관광객들을 고색 찬란한 신비의 땅으로 끌어들였다.

 Ⅲ. 애굽 고고학과 성경

 고고학자들이 애굽에서 발견한 것들로 인하여 덕을 본 것은 언어학자, 역사가, 미술 애호가, 고대 종교연구가뿐 아니라 성경 연구자도 마찬가지였다. 벽화, 돌과 나무에 새긴 부조, 가구, 가정용 세간, 악기, 장인용(匠人用) 기구, 농사용 기구, 사냥용 무기, 전투용 무기, 그리고 깨지기 쉬운 물질 위에 기록한 서류 등 이와 같은 것을 애굽보다도 더 많이 간수한 국가는 없다. 어떤 성경 사전을 뒤적여보아도 성경 시대의 문화와 문명을 이해시키는 데 유용한 예증 자료를 이 나라만큼 많이 제공하는 국가가 없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고대 애굽의 채색 그림과 부조들을 통하여 우리는 아모리족, 가나안족, 블레셋족, 헷족의 의상과 모습, 도구, 무기, 전쟁 양상 등을 알 수 있다. 애굽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고대인들이 어떻게 집을 꾸미고 살았으며, 어떤 악기를 어떻게 연주하였는지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지난 1세기 반에 걸쳐 애굽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발견을 통하여 성경 시대의 일상 생활을 상세히 보여 주는 빛을 엄청나게 많이 받게 된 것이다.
 다음은 구약 성경의 기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애굽에서의 중요한 발견 몇 가지이다. BC 20세기경에 애굽 궁정 관리인 시누헤(Sinuhe)란 사람이 있었는데 죄목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그 잘못 때문에 수세기 후에 모세가 그랬듯이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동방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그는 갖은 고생과 모험 끝에 수리아에서 피난처를 찾았으며 그곳에서 도망자로서 여러 해 동안 가나안족과 함께 살다가 후에 사면되어 본국인 애굽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남긴 가나안의 당시 모습은 매우 큰 흥미를 끌고 있다. 그가 기록한 지 약 1세기 후에 아브라함이 그곳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기록을 통하여 족장들이 맞부딪쳤던 상황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브라함 당시의 애굽인 귀족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거기에는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주해 오는 남녀, 어린이 등 37명의 모습이 채색 벽화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4,000년 전에 그려진 것이지만 그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기 때문에 마치 수년 전에 그린 것처럼 선명하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애굽 방문을 상상할 수 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처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유사한 의복을 입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도 유사한 도구와 무기, 악기 등을 가졌을 것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것으로는 주술적 본문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애굽 왕들이 국내와 국외의 원수들을 멸망시킬 목적으로 기록한 저주 문서이다. 애굽은 고대 세계 중에서도 마술이 탁월히 발전되었던 땅으로 우리는 이 사실을 모세의 체험에서 알 수 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서서 신적(神的)인 이적을 행하자 이를 본 애굽 마술사들은 그대로 모방하였다. 족장 시대에 해당하는 주술적 “저주 문서”(execration texts) 두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가나안 통치자 100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기록된 이름들 중 절반 이상은 아모리족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족장 시대 팔레스타인의 점령자가 아모리족이었다는 성경의 초기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참조 창 14:13; 15:16). 이 본문들 속에는 예루살렘도 언급되어 있으며, 아모리족의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예루살렘 왕이 애굽의 원수로서 저주를 받고 있다. 이들 문서에 기록된 성경상의 도시로는 아스글론, 악고, 아베가, 라기스, 하솔, 세겜 외에도 많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출애굽을 전후하여 애굽 제국은 팔레스타인으로 여러 번 군사 원정을 나갔다. 그 중에는 출애굽이 있기 30여 년 전에 일어났을 므깃도 전쟁에 관한 유명한 기록도 있다. 애굽 왕들은 연대기 외에도 자신들이 정복한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수백 개 도시 이름이 열거된 목록들을 남겨 놓았다. 여호수아에 나타난 지리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애굽 목록들을 아주 가치 있게 참고할 수 있다. 그들이 정복한 팔레스타인 도시들에 관한 마지막 목록은 시삭 왕이 카르낙 신전 벽에 새겨놓은 것이다. 시삭 왕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5년에 예루살렘을 약탈했던 인물이다(참조 왕상 14:25, 26).
 우리는 BC 14세기 이후의 궁정 문서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애굽의 아멘호테프 Ⅲ세와 아멘호테프 Ⅳ세가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봉신들로부터 받은 수백 통의 사무 문서이다. 소위 아마르나 편지라 알려진 이 문서들은 1887년에 시골 여인이 우연히 발견하였는데, 애굽에서 발견한 것들 중 가장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학자들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당시의 외교어로 바벨론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바벨론인들의 설형 문자가 애굽 궁정과 팔레스타인, 수리아의 봉신 군주들 간에 통신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점도 밝혀졌다. 이 편지들을 통하여 BC 14세기, 곧 여호수아와 장로들의 지도하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 애굽의 정치력이 약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편지 중 어떤 것은 헷족의 예루살렘 왕 압두케파가 보낸 것인데, 그는 침략자 하비루(Habiru)가 이미 자기 왕국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고 전 지역을 장악할 위기에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수도를 방어할 애굽 군사와 무기를 보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이 편지에 나오는 하비루는 히브리 민족이 거의 분명하며 많은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가나안 민족들이 히브리 민족의 가나안 정복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이 문서들은 여호수아에 의해 묘사되어 있는 가나안 정복 시기 동안에 팔레스타인이 어떤 여건 가운데 있었는지 잘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중요성을 띤다.
 애굽 왕들은 자신들이 거둔 승리나 정치적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서 돌비석 형태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러한 비석들 중 하나가 사사기 시대에 살았던 바로 중 하나인 메르넵타에 의해 세워졌는데, 이 비석은 메르넵타가 팔레스타인 출정 기간 동안에 아직 정착이 되지 않은 이스라엘을 패배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애굽 왕과 이스라엘 민족이 대결했던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명각은 이스라엘을 최초로 언급한 성경 외의 자료라는 점, 또한 13세기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안에 존재했음을 증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비평가들은 메르넵타 시대에 출애굽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상 그 주장과 명각의 내용을 조화시키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출애굽 사건을 뒤늦은 시기로 놓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아니며,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일부 이스라엘 민족을 메르넵타가 쳐부순 것이라고 궁색하게 둘러대고 있다. 솔로몬보다도 480년 이전에 출애굽이 있었다는 성경상 연대를 받아들이게 되면(참조 왕상 6:1) 이러한 해석상의 난관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르넵타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미 170년 정도나 가나안에 정착하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시내 반도에서 발견된 최초의 알파벳 명각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들은 1904~1905년에 플린더스 페트리 경이 시내 반도 서부에 있는 두 개의 골짜기에서 고대 애굽인들이 구리와 터키옥(玉)을 캐내던 광산을 탐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계속된 탐사를 통해 더욱 많은 명각들을 발견하였고, 지난 35 년간 수많은 학자들의 협력을 통하여 마침내 그것들을 해독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광산 내부 혹은 근처에 애굽인들이 남겨놓은 수많은 상형 문자를 통하여 광산의 발굴 역사를 아주 상세히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애굽인들은 일반적으로 가나안으로부터 셈족들을 고용하여 일꾼으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애굽인들은 기록하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형 문자를 사용했던 반면, 이들 가나안 족속들 중에서는 전 시대에 걸쳐 가장 훌륭하다고 볼 수 있는 문자가 발명되었다. 사실상 그들이 발명한 25개의 알파벳은 오늘날까지도 더 발전하거나 단순해지지 않은 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애굽인들과 기타 민족들은 자신들의 문자 체계를 사용하여 사상을 기록하려 할 때 수백 또는 수천 개의 문자가 필요하였다. 부호도 사용되었는데, 각각의 부호들은 한 음절을 대표하거나(예: en, ne, in, ni, nen, nan) 한 쪽 눈을 그려놓은 그림처럼 하나의 완전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시내 반도에 거주하는 이 무명의 셈족이 어떤 자음도 모음과 연결시키지 않고 매 자음마다 오직 한 글자로 소리를 내도록 모음과 자음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은 그 이전의 어떤 기록 체계보다도 월등하게 향상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는 데는 오직 몇몇 문자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모세 시대 바로 직전, 모세가 성경의 첫 책들을 기록했던 바로 이웃 지역에서 이러한 발명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성경이 여러 해가 걸려야 숙달할 수 있는 애굽의 상형 문자나 바벨론의 설형 문자처럼 복잡한 문자로 기록되었다면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반면에 겨우 25개의 문자로 기록할 수 있는 알파벳 체계라면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누구든지 단기간에 습득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성경도 스스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이적인 발명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대부분은 읽기와 쓰기를 신속히 익힐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땅이 제공해 준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서뿐 아니라 성경 자체의 증거를 통해서도 이상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드온 시대에는 요단 동편 지역의 족속들이 읽고 쓸 수 있었음을 사사기 8장 14절에 나타난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기드온이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신문하매 숙곳 방백과 장로 칠십칠 인을 그를 위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시내 반도 광산 지역에서 이러한 알파벳 문자 체계가 고안된 때가 BC 16세기인지 19세기인지, 그 시기에 대하여 학자들은 단정을 내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모세 시대 이전에 이런 일이 이루어졌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발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는 데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가는 종교개혁 이전 기독교 시대인 15세기에 인쇄기가 발명된 것과 비교할 만하다. 인쇄기가 발명되어 지상에 있는 어느 국민이든지 아주 싼값에 성경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문자의 발명으로 사람들은 교육을 별로 받지 않고도 기록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시내 반도에서 발견된 최초기의 알파벳 명각들은 기껏해야 이름들과 봉납을 위한 상투적 문구 몇 개였을 뿐이지만, 이것은 모세가 그의 저작으로 인정되고 있는 책들을 기록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들을 상당히 많이 씻을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비평가들은 히브리어 성경이 모세 시대에는 기록될 수 없었으며, 히브리인들은 당시에 기록할 수 있는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사 시대 동안에 블레셋, 수리아, 가나안 등과 싸운 전쟁 기록 외에도 애굽인들은 팔레스타인 여행기까지 남겨 놓았다. 어떤 기록은 애굽인 관리 웬-아문(Wen-Amun)이 베니게의 항구 도시 비블로스로 삼나무 목재를 사러 간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나일강에 띄울 한 척의 제사용 배를 건조하려고 그곳에 갔던 것이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에서 당혹스러운 경험들을 했을 뿐 아니라 만나는 통치자들로부터도 수치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당시에 애굽의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웬-아문의 비블로스 방문기와 그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여행하면서 기록한 편지는 사사 시대의 특징을 묘사한 다음의 성경 말씀을 여실히 예증해 준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같은 시대에 나온 한 편의 풍자적인 편지가 있는데, 이것은 애굽 관리 한 사람이 애굽의 외교관으로서 팔레스타인을 거쳐 북쪽 나라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는 밤중에 말을 도둑맞았으며 그 땅의 불안정한 형편 때문에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엄청나게 많은 고대 “지혜 문학”이 애굽의 모래 속에 보존되었다. 이 특별한 문학 양식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애굽에 풍부하였으며, 그에 대한 명성은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왕상 4:30)는 말씀 속에서 엿볼 수 있다. 많은 현대 학자들은 구약의 “지혜 문학서”(욥기, 잠언, 전도서)와 애굽의 것을 비교하며, 구약의 것은 인접해 있는 애굽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의 잠언에 나오는 구절과 매우 유사한 구절을 많이 담고 있는 “아메네모페의 교훈집”의 경우에도 아메네모페가 솔로몬의 문학 작품에서 많은 것을 빌렸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아메네모페의 교훈집을 포함하고 있는 문서 속에 나타난 언어 구조, 어휘, 단어 형태, 필기 형태 등은 솔로몬보다 후기 시대에 나온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잠언의 저자는 솔로몬이 아니라 아주 후기의 익명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고등비평의 대열에 선 사람만이 잠언이 그 자료를 애굽인 아메네모페에게서 빌려왔다고 고집한다.
 1904년에 본토인들이 잘 보존된 아람어 파피루스를 상부 애굽의 나일강에 있는 엘레판티네 섬에서 발견하였다. 1906년과 1907년에 이 섬에서 실시한 발굴을 통해 파피루스 자료들이 더 발견되었으며, 최근에는 애굽 골동품 수집가인 C. E. 윌버(C. E. Wilbour)가 많이 발견하여 현재 브루클린 박물관에 소장하였다. 이 모든 파피루스들은 100여 점에 이르는데, BC 5세기경, 곧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애굽 남부 국경을 수비하던 유대인 군대 주둔지에서 보내온 것이다.
 이 자료들과 당대에 애굽 타지역에서 나온 유사한 자료들은 애굽에 있는 유대인 군거지(群居地)의 세속적 및 종교적 형편과 아울러 그들의 역사를 보여 준다. 이 아람어 문서들은 에스라와 다니엘의 아람어 부분에 기록된 언어와 사실상 동일한 언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에스라와 에스더의 유사한 부분들이 결코 날조된 것이 아님을 증거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더 나아가 이것들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한 역법과 바사 왕들의 통치 연대를 계산하는 방식에 대해 알려 주는 유일한 성경 밖의 자료이다. 이 자료들을 통하여, 에스라 7장의 사건은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BC 458년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BC 457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애굽의 흙덩이들은 성경의 각기 다른 시대인 족장 시대, 출애굽 시대, 사사 시대, 열왕 시대, 바벨론 포로 후기 시대에 관해 빛을 비추어 주는 자료들을 보존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는 각각 어떤 사건의 부분들 또는 어떤 한 구절의 본문을 확증해 주는 약간의 예들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애굽으로부터 얻은 축적된 증거들은 그 전체가 구약의 기록들을 옹호하고 구약 역사의 정확성을 확증시켜 주고 있다.
 고고학이 제공한 풍부한 자료를 돌아보면서, 애굽의 흙덩이들은 구약 학자들에게뿐 아니라, 신약 학자들을 위해서도 중요한 자료들을 보존해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서 신약의 언어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헬라어 파피루스들이 무수하게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견들은 본 논문의 범주에 들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

 Ⅳ. 고대 메소보다미아의 부활

 “강들 사이의 땅”이란 뜻을 가진 메소보다미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간직하고 있다. 그 두 개의 강 이름인 유브라데와 티그리스는 낙원(창 2:14)에 관한 묘사 속에 등장하며, 그곳의 시날 평야에는 최초의 도시와 탑(창 11:4)이 건설되었으며, 그 탑은 후에 그토록 많은 메소보다미아 신전탑들의 원조가 되었다. 고고학은 메소보다미아 문화의 상고(上古)를 확증해 주고 있다. 
 애굽과는 대조적으로 광대한 메소보다미아 땅 위에는 기념할 만한 유적이 지상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신전이나 피라미드, 높이 솟은 방첨탑, 바위를 깎아서 만든 채색 벽화가 있는 묘실 또는 이 고대 학문과 문화의 땅을 방문하도록 유혹하는 그 무엇이 전혀 없다. 모든 고대 도시들은 완전하게 파괴되었으며, 그 궁전과 신전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퇴적물들과 모래로 뒤덮였다. 바벨론과 니느웨 등 한때 고대 세계 최대, 최강의 수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사실상 완전히 소멸되어 그 위치까지도 잊혀졌다. 진실로 200년 전까지만 해도 성경에 그토록 많이 언급되고 고전 작가들도 그토록 많이 묘사하는 이 도시들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니느웨는 고대에도 완전히 잊혀진 상태에 있었다. 니느웨가 멸망한 지 불과 200년 정도밖에 안 된 BC 401년, 크세노폰(Xenophon)이 1만 명의 헬라인들과 함께 페허된 그 고대 도시를 지나갈 때 그곳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 지역에 한 사람도 없었다. 대신에 크세노폰은 그 도시는 메대의 도시 중 하나인 “메스필라”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AD 2세기경 아테네의 작가인 루키아노스(Lucian)는, “니느웨는 아주 철저히 멸망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위치를 말할 수 없으며, 니느웨의 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라고 선언하였다.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그토록 거대했던 도시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란 의문이 학자들의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 흔적이란 남는 법이라고 말하였다. 로마, 아테네, 테베, 예루살렘 등등의 도시가 멸망하기는 했지만 그 위치는 결코 잊혀지지 않았으며 다시 재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는 어디에 있으며 고대의 위대한 바벨론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했던 학자들은 그 도시들이 아직도 최고의 영광과 권세를 누리고 있을 때 결국은 흔적도 없이 멸망되리라고 예고했던 예언들(니느웨의 멸망에 대해서는 나훔 3장을,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서는 이사야 13장 19~22절을 참조할 것)이 성취된 결과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 퇴적물과 모래 밑에 수만 개의 문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각물들을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궁전, 신전, 문서 보관소, 평민 거주지 등의 유적을 가진 많은 도시들을 감추어 두었던 지방의 형편이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출토된 유적들을 통하여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잊혀져 온 고대 유명 제국들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언어학자들은 거의 2,000 년간이나 사어(死語)가 되었던 언어와 문자들을 부활시킬 수 있었고, 이런 일을 통해 성경 학자들은 성경 기사의 역사적 진실성을 옹호할 수 있는 증거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동시에 성경에 대해 비평적인 세상을 향해 그 옛 책은 진리이며 신뢰할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메소보다미아 본문들이 기록된 설형 문자 판에 대해서 여기서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없어지기 쉬운 물질 대신에 그 지역에서 흔히 사용되던 점토판을 기록용 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점토판은 메소보다미아의 습한 토양 속에서도 잘 보존되었는데, 특히 불에 구워냈을 경우에는 사실상 결코 파괴될 수 없었다. 그들은 갈대 펜촉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진흙 위에 글자를 새겼다. 각 글자의 새긴 모양이 마치 쐐기를 닮았기 때문에 설형 문자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기념비의 경우에도 돌 위에 이러한 설형 문자를 새겨 넣어 사용하였다.
 바벨론, 앗수르, 수메르 등의 메소보다미아 제국이 갖고 있던 고대 글자를 해독하게 된 것은 그 자체가 거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제타 돌처럼 병행하는 문구가 있어서 아는 글자와 언어를 열쇠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전혀 아니다. 오직 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해독을 위한 기초 작업이 이루어졌다. 최초로 설형 문자 명각이 유럽에 들어간 것은 18세기였는데, 그 명각들은 고대 바사의 수도 중 하나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의 페허에서 나온 것이다. 최초로 이 명각들을 해독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독일의 고전학자 그로테펜트(Grotefent)로서, 그는 아주 기발한 추측으로 고대 바사 명각에 나타난 몇몇 단어와 구절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초보적 성공을 뛰어넘어 전진하지 못하였다. 40년 후에 나타난 헨리 롤린슨(Henry Rawlinson)을 통하여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동인도회사의 젊은 장교 롤린슨은 이란 주재 영국 영사 시절인 1844년에 베히스툰에 있는 거대한 바위의 명각을 복사하였다.
 베히스툰은 메소보다미아와 바사 사이의 산악로에 있다. 대왕 다리오 Ⅰ세가 길가 높은 곳 에 있는 바위벽에 부조(浮彫)들과 긴 명각을 남겼다. 오랜 세기에 걸쳐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앞을 지나다녔다.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 부조들은 성경에 나오는 삼손과 그의 적을 묘사한 것이라고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제자들과 함께 있는 어느 교사라고 설명하였다. 재능이 풍부하고 야심만만한 젊은이 헨리 롤린슨은 거의 접근을 불허하는 그 긴 명각을 해독하는 일에 도전하였다. 그는 깎아지른 절벽에 돌출한 좁은 선반 같은 곳 위에 긴 사닥다리를 세운 후, 침착하고 끈기 있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그 명각들을 복사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글을 해독하는 어려운 과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그 명각들이 하나의 본문을 바사, 수사, 바벨론 등 3개 언어로 기록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롤린슨은 각각의 설형 문자가 바사, 수사, 바벨론의 페허에서 발견된 설형 문자 부호들과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언어학적 문제들을 쉽게 포착하여 올바르게 조합하고 추측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던 터라 롤린슨은 즉시 바사의 설형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바사어는 알파벳 문자에 가깝고, 50개 이내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 가장 쉽게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두 언어는 수백 개의 문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해독이 훨씬 힘들었으나 여러 인명과 지명 덕택에 롤린슨은 해독해낼 수 있었다. 이것들은 세 개의 본문에 각각 반복해서 나왔던 것이다.
 롤린슨이 자기의 연구 결과를 출판해낼 때 다른 학자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아일랜드의 성직자인 에드워드 힝크스, 사진술의 탁월한 발명가인 폭스 탤버트, 롤린슨의 해독을 근본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판단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세부 사항을 세련되게 완성시킨 파리의 J. 오페르(J. Oppert) 교수 등이 있다.
 대대로 낭패감만 안겨 주던 신비의 설형 문자가 해독되었다는 사실은 프랑스의 위대한 셈 학자(Semitist) 에르네스 르낭(Ernest Renan)을 비롯한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에게 의혹을 샀다. 그들은 롤린슨과 그의 동역자들이 기만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탤버트는 왕립 아시아 학회로 하여금 최근 발견되어 아직 해석이 알려지지 않은 설형 문자 사본을 여러 명의 학자들에게 보내어 각기 나름대로 해석해 보도록 하라고 제안하였다. 이 실험은 1857년에 시행되었다. 롤린슨, 탤버트, 힝크스, 오페르 등이 각자의 해석을 인봉하여 제출하였을 때, 그 봉투는 영국에서 가장 탁월한 학자들이 모인 곳에서 개봉되었다. 그 결과 그 번역문들은 모든 주요 부분에 일치하였고, 같은 본문을 두고 각기 해석하였을 때 항상 그러하듯 사소한 부분에서 약간 차이를 보였다. 이 실험을 통해 아무도 설형 문자 해독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로 많은 작업이 이루어졌다. 쉬라더(Schrader), 델리취(Delitzsch), 란츠베르거(Landsberger)와 이들이 이끄는 연구원들은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 방언상의 차이점을 발견하였고, 새로운 형태의 사본들을 해독하였고, 설형 문자 문법서와 사전 등이 발간되었다. 시카고 대학교에서는 방대한 부피의 앗수르어 사전을 발간하는 중이며, 이 거대한 사업을 위하여 12명 이상의 학자들이 수십 년간이나 계속해서 헌신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고대 수메르, 바벨론, 앗수르, 후르, 엘람, 바사, 메소보다미아의 기타 작은 국가들과 인근 지역의 언어 및 문자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100 년간에 걸친 피눈물나는 연구와 고투 끝에 고대 국가들이 소유하였던 법적, 종교적, 역사적, 문학적 작품들을 읽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구비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역사와 종교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성경 연구를 위한 가치 있는 배경 자료들을 제공하고, 비평가들의 공격으로부터 구약의 수많은 기사를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언어학자들을 떠나서 고고학자들의 업적을 되새겨 보아야만 한다. 그들은 19세기 중반기부터 설형 문자 학자들이 읽고 번역하고 해석해낸 방대한 자료들을 우리에게 제공하였다.
 여행가들은 메소보다미아의 페허더미에서 명각이 새겨진 돌, 벽돌, 기타 고대 유물 등을 이따금 주웠다. 그러나 근대 고고학자로서 최초의 메소보다미아 고대 유적지 발굴의 영광은 프랑스의 고고학자인 폴 에밀 보타(Paul Emil Botta)에게 돌아갔다. 그는 자기가 파헤치고 있는 곳이 고대 니느웨의 유적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서 쿠윤직(Kuyunjik)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티그리스 건너편, 근대의 모술(Mosul) 인접 지역인 이 유적지에서 예상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보타는 활동 무대를 코르사바드(Khorsabad)로 옮겼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앗수르 왕 사르곤의 궁전을 백일하에 드러내 놓게 되었다.
 3년 후에 성경상의 갈라인 니므룻을 발굴한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Austen Henry Layard)가 보타와 합세하였다. 레이어드는 보타처럼 수많은 석조 양각, 사람의 머리를 가진 황소, 사자, 기타 조각품, 상아와 기타 값어치 있는 물품들을 발굴해냈으며, 그는 고고학을 인기 있는 학문으로 만들었다. 다재다능한 그의 펜을 통해 책자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니느웨와 그 유물들은 당대에 여러 차례나 재판되면서까지 베스트 셀러 자리를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레이어드가 발굴해낸 고대 기물들이 런던에 도착하였을 때 그것들은 고대 앗수르 유물로 유명한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었다. 그의 발굴물들은 수집되어 있는 앗수르 유물들 중에서도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메소보다미아 고고학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수차례에 걸쳐 성공적인 원정이 이루어졌으며, 레이어드와 그의 후계자 호르뭇드 라삼(Hormuzd Rassam)은 수많은 장소를 발굴하여 차례차례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니느웨에서 두 개의 대형 도서관이 발굴되었을 때 선풍적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슈르바니팔 왕과 나부 신전의 도서관으로서 10,000개 이상의 점토판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점토판들 중 하나가 20년이 지난 1872년에 엄청난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당시에 젊은 앗수르학 학자 조지 스미쓰(George Smith)는 그 점토판들 중에서 고대 바벨론인들이 홍수에 대해 기록해 놓은 기사를 발견하였다. 성경 고고학은 19세기 중에 가장 큰 지지 세력을 얻게 된 것이다. 다음의 구절은 시대에 뒤진 것이긴 하지만 스미쓰가 단번에 알아보고 번역한 것이다.
 “이런 과정 중 일곱째 날 나는 비둘기를 내보냈으며, 그것은 떠나갔다. 비둘기는 나가서 쉴 만한 장소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나는 참새를 내보냈고, 그것은 떠나갔다. 참새는 나가서 쉴 만한 장소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나는 까마귀를 내보냈고, 그것은 떠나갔다. 까마귀는 떠나가서 물 위에서 시체들을 보았고, 그것을 먹고 헤엄치고 떠돌아 다니다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초원의 불길처럼 기독교 세계에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엄청난 열광과 흥분 속으로 빠져들었다. 런던의 최대 일간지 중 하나인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서판의 나머지 부분을 찾아내도록 스미쓰를 원정 보내겠다고 즉시 제안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스미쓰는 찾고 있던 바로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런 “행운”은 극소수의 고고학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차 원정 이후에 2차와 3차 원정이 이루어졌지만 불행하게도 그 젊은 앗수르학 학자 조지 스미쓰는 제3차 메소보다미아 여행 중에 죽고 말았다.
 탐사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889년에 미국인들이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닙푸르(Nippur)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이 도시는 한때 초기 수메르인들과 바벨론인들의 문화적 및 경제적 중심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발굴단은 이곳에서 고대 수메르인들의 기록을 담은 서판들을 엄청나게 많이 발굴해내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메소보다미아의 셈족들보다 앞선 족속으로서 가장 일찍 문자를 발명한 사람들이다. 또한 방대한 분량의 서판이 모아져 있는 것을 발굴하였는데, 이것들은 바사의 아닥사스다 Ⅰ세와 다리우스 Ⅱ세 시대의 한 커다란 상점에서 나왔다. 이 상점은 많은 유대인들과 상업 거래가 있었기 때문에 이 거래 장부는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 유대인들의 생활상을 잘 보여 준다.
 그 이후에는 1899~1917년에 걸쳐 독일인들이 참가하여 고대의 대도시 바벨론, 곧 느부갓네살의 유명한 수도를 발굴하였다. 또한 1903~1913년에는 고대 앗수르의 도시인 앗수르를 발굴하였다. 이들 두 지역에서 과학적 발굴법이 개발되어 이후 작업의 표본으로 등장하였으며,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모든 발굴 작업은 이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대 메소보다미아 제국의 문명과 역사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얻게 된 것은 양 차 세계 대전 사이의 고고학적 활동을 통해서였다. 제한된 지면 때문에 우르, 에렉, 누지, 마리에서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굴활동만을 다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장소에서 아주 중요한 활동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텔로(프랑스), 키쉬(영국), 코르사바드와 디얄라 지역의 두 유적지(미국), 기타 다른 장소에서 이루어진 작은 발굴활동들이 그것이다.
 갈대아의 우르는 아브라함이 청년기를 보낸 도시로서(창 11:31) 영미 연합 발굴단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이 발굴단은 이곳에서 레너드 울리 경(Sir Leonard Woolley)의 지휘 아래 1922년부터 1934년까지 활동하였다. 그들은 우르의 커다란 지구랏과 신전탑을 철저하게 뒤지며 조사하였다. 이 건축물들은 아직도 메소보다미아의 지상 건축물들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에 속한다. 우르의 신전, 궁전, 거주지 등이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브라함 당시에 우르는 높은 수준의 문명 생활을 누리고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이곳 교육 기관에는 최상급의 학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르에서 가장 인기를 끈 발견은 전설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부유한 왕들의 무덤이다. 금, 은, 각종 보석들은 애굽의 투탄카멘 왕 묘실에서 나온 것과 거의 대등하였다. 왕과 여왕을 매장할 때는 시중들던 사람들, 호위병, 가수들, 병거와 짐승, 가구와 보물들을 함께 매장하였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악기들, 정교한 금속 가공품들, 고급품에 속하는 상감 세공물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것들이 발견됨으로 옛 사람들은 원시인에 불과하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인간은 예술적, 심미적 재능을 계발할 수 있었다는 주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울리가 홍수 표면(Flood level)이라고 불렀던 것이 창세기에 기록된 홍수의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울리는 그것을 노아 홍수의 증거로 보았지만 이 홍수 표면은 고대에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이 일으킨 국부적 홍수의 자취에 불과하다. 이것이 국부적 성격의 홍수였음은 울리가 인근의 엘-오베이드(el-Obeid) 유적지에서는 홍수 표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이 유적지는 우르보다 고원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우르를 멸망시킨 대재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우르의 발굴을 성경상의 홍수 증거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 사건의 범세계적 성격을 받아들이지 않고 노아 홍수를 메소보다미아에만 관련된 국부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우리는 울리가 대홍수의 증거로 제시하는 발견물들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양차 세계 대전 사이에 발굴되어 메소보다미아의 초기 문명을 밝혀준 또 다른 장소를 말하자면, 성경상에 에렉(창 10:10)으로 등장하는 도시인 우루크(Uruk)를 들 수 있다.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본토인들은 불법적으로 이곳에서 수많은 서판들을 파내어 유럽과 미국의 여러 박물관에 넘겼다. 학자들은 과학적 발굴 작업을 하기 이전에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하여 어떤 것들이 발굴될지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
 독일인들은 그 도시를 1928년부터 1939년까지 발굴하였다. 그들은 특별히 초기 메소보다미아 시대의 수많은 건축학적 문제들을 명백히 밝혀내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최초기의 문자 시대에 나온 설형 문자 점토판을 상당히 많이 발견하는 행운을 붙잡았다. 이 점토판들은 문자의 발전 단계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순수한 그림 문자 단계에서 반그림 문자 또는 반사상 문자 단계로, 수많은 문자를 갖고 사물이나 사상이 아니라 소리를 표현하는 음절 형태 단계로 발전해 온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자 체계는 알파벳 문자보다 약간 열등하지만 단순한 그림 문자보다는 월등하게 향상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초기 알파벳 문자에 비해 한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곧 초기 알파벳 문자는 모음을 표시하는 문자가 없었지만 이 음절 문자는 자음과 모음을 모두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 한 예로 세 개의 설형 문자로 기록된 하르-라-누(har-ra-nu)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이 단어는 “길”을 뜻하는데 우리는 당시에 “길”을 하르라누라고 발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음이 없이 기록된 고대 히브리어는 “길”을 ㄷ-ㄹ-ㅋ(d-r-k)로 표기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중세 시대 초기부터 유대인 학자들이 전통적으로 발음해 온 데레크(derek)라는 발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사실상 구약 시대에는 어떻게 발음되었는지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성경과 고대 오리엔트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인들에 의한 누지(Nuzi)의 발굴이다(1925~1931). 누지는 현재의 석유 도시인 키르쿠크(Kirkuk) 근처에 있다. 이곳에서 나온 수많은 본문들은 비록 세련되지 않은 바벨론어로 기록되긴 했어도 BC 제2천년기 전반인 족장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01~1902년에 성경상의 도시인 수산의 폐허에서 나온 유명한 함무라비법전을 제외하고는 누지에서 나온 자료들은 어느 다른 도시에서 나온 자료들보다도 족장 시대에 관하여 더욱 많은 빛을 던져 주었다. 다음 항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예증해 주는 누지 본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누지 때문에 성경상 호리 족속으로 알려진 고대 후리 족속이 역사적 부활을 맞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언어, 역사, 문화가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되었다.
 메소보다미아에서 발굴한 수많은 중요한 유적지 중 맨 마지막 것으로 마리(Mari)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도시는 한때 아모리 족속의 대도시로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본문에서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이 도시를 찾기 위하여 오랫동안 조사 활동을 벌였지만 실패만 거듭했을 따름이다. 최종적으로 W. F. 올브라이트는 중부 유브라데의 텔 엘-하리리(Tell el-Hariri)를 가능 지역으로 제안하게 되었고, M. 파로(M. Parrot)의 지휘 아래 그곳을 발굴하기 시작한 프랑스 발굴단은 올브라이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함무라비 시대의 대궁전(BC 18세기)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수천 개의 서판을 갖추고 있던 문서 보관소를 발견하였다. 이 문서들은 아모리 족속이 마리를 수중에 넣고 있던 당시의 것들로서, 그들은 통신과 문서용으로 바벨론 글자와 언어를 사용하였다. 마리 본문들은 간헐적으로 여러 권의 책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책이 간행됨으로 족장 시대의 근동 역사에 관한 지식은 혁명을 겪게 되어 BC 1500년 이전의 메소보다미아 역사들은 종전에 추측되던 것보다도 훨씬 이전 시대로 연대가 매겨지게 되었다.
 메소보다미아에서 발굴된 문서들이 얼마나 방대한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레이어드와 라삼은 니느웨에서 발굴한 25,000개에 달하는 점토판을 영국박물관으로 가져왔고, 드 사르제크(De Sarzec)의 일꾼들은 1894년에 텔로에서 40,000개의 점토판을 발견하였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발굴단은 닙푸르에서 10,000개 이상을 발견하였다. 기타 학문 단체나 본토인들의 발굴활동을 통해서도 수만 개의 점토판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근동, 유럽, 미국 등지의 각 박물관에 두루 퍼져 있는 알려진 문서들만 계산해도 이미 수십만 개에 달하며, 이것들은 메소보다미아의 땅 속에 파묻혀 있는 문서량의 10퍼센트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점토판들의 대부분은 흥미를 끌지 못하는 사무 문서, 계산서, 화물 송장, 비망록, 증서, 영수증 등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지극히 중요한 역사적, 종교적, 문학적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우리는 상당히 많은 정보를 갖고 이 문서를 사용했던 고대 민족들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 다음 항에서는 성경 연구에 큰 중요성을 지닌 이 자료들을 개관할 것이다.

 Ⅴ. 메소보다미아 고고학과 성경

 그 누구도 유럽의 고등비평 학파를 대적할 수 없었던 시대에 롤린슨과 그의 동역자들이 설형 문자 명각들을 해독함으로써 얻은 최초의 결실 중 하나는 성경이 옹호를 받게 된 것이다. 당시에 성경에만 나오던 앗수르 왕 사르곤의 이름(사 20:1)을 발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고전작가들 중 그 어느 사람도 그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고등비평가들은 사르곤을 전설상의 인물로 못박아버렸으며, 어떤 이들은 살만에셀의 다른 이름이 사르곤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늘날에는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그곳의 거주자들을 포로로 잡아간 사르곤은 앗수르 역사에서 아주 잘 알려진 인물로 대두되었다.
 1872년에 조지 스미쓰가 바벨론인들의 홍수 설화를 발견하여 종교계에 던져 준 충격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서 그 홍수 설화를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설화는 그간에 발견된 다른 홍수 설화들보다도 훨씬 성경에 가깝기 때문이다.
 바벨론 홍수 설화는 위대한 서사시의 한 부분인데, 이 서사시는 길가메쉬(Gilgamesh)라는 주인공이 영생을 찾아 돌아다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생명의 약초”를 찾아다니던 중 지하 세계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바벨론 홍수 이야기의 주인공인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을 만났다. 우트나피쉬팀은 그에게 대홍수와 그로부터의 구출, 신들 중에 자기 자리를 잡게 된 경로 등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우트나피쉬팀은 신들이 죄 때문에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을 때 유브라데의 슈룹팍(Shuruppak)이란 나라의 국왕이었다. 우트나피쉬팀은 자기 집을 부수고 배를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배의 규격에 관해서도 지시가 주어졌으며, 그 배에 모든 생물을 실어야만 했다. 그러나 동료 인간들에게는 마르둑(Marduk) 신이 자기를 저주했기 때문에 더 이상 마르둑 신의 영토에 살 수 없어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가야만 한다고 속이도록 지시를 받았다. 바벨론 설화는 이 점에서 성경 기록과 가장 크게 차이가 난다. 노아처럼 많은 세월에 걸쳐 동료 인간들을 경고하는 대신 바벨론의 전설상의 주인공은 신들에게 이용되어 홍수 이전의 사람들을 속임으로써 도래하는 멸망에 쉽게 희생되도록 하였다.
 우트나피쉬팀은 배를 짓고 그 안에 필수품, 짐승들, 자기 가족을 실은 다음에 항해를 선장인 푸주르-아무리(Puzur-Amuri)에게 넘겨 주었다. 즉시 홍수가 시작되었다. 폭풍과 홍수가 어찌나 격렬하였던지 신들까지도 자신들이 몰고 온 엄청난 재난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신들은 그 홍수가 두려워서 뒤로 물러나 아누(Anu)의 하늘로 올라갔다. 신들은 개들처럼 위축되어 바깥 벽이 있는 곳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 엄청난 폭풍은 6일 낮과 6일 밤 동안 계속되었고 모든 생물들을 멸절시켜 “진흙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우트나피쉬팀은 엄청난 멸망을 보고 무릎을 꿇은 채 울었다. 어느 날인가 시야에 하나의 섬이 들어왔고 배는 니시르 산(Mt. Nisir) 정상에 닿았다. 우트나피쉬팀은 한 주일을 기다린 후 제7일에 비둘기 한 마리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 비둘기는 머물 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그 다음에 그는 참새 한 마리를 내보냈지만 똑같은 결과를 맞았다. 세 번째 새인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땅이 마른 것을 알게 된 우트나피쉬팀은 방주를 떠나 제사를 드렸다. 신들은 제사의 향기를 맡고 기뻐하였다. 후에 그들은 우트나피쉬팀에게 불멸성을 부여하고 그를 신들 중에 자리잡도록 하였다.
 이 설화는 창세기와 신약의 몇몇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경상의 기록과 일반적인 점에서 유사하며, 심지어 세부적인 면에서도 유사한 점이 있다. 다음은 그 유사한 점을 열거한 것이다:
 (1) 홍수의 주인공들로서 성경 속의 노아와 바벨론 설화 속의 우트나피쉬팀은 모두 위협적인 홍수에 관하여 신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2) 대홍수는 지은 죄에 대한 신적 심판이었다.
 (3) 총애를 받은 주인공들은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모든 재산을 버리고 배를 지어야만 하였다.
 (4) 그는 가족과 짐승들을 배에 실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5) 배를 지으라는 지시와 아울러 배의 규격에 관해서도 지시를 받았다.
 (6) 주인공은 순종하였으며, 기별의 내용은 서로 매우 상이할지라도 그의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기별을 받았다.
 (7) 배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내렸으며, 하나의 출입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다.
 (8) 가공할 만한 폭풍과 비가 대홍수를 초래하였다.
 (9) 배 안에 있지 않은 모든 인간은 멸망당했다.
 (10) 물이 줄어든 후에 배는 어느 산에 닿게 되었다.
 (11) 땅이 말랐는지의 증거를 얻기 위하여 새들을 내보냈다.
 (12) 배에서 나온 후에 제사를 드렸다. 신은 그 제사를 기쁘게 가납하였다.
 성경과 바벨론 설화 사이의 상이점도 마찬가지로 명백히 찾아볼 수 있다:
 (1) 성경 기록은 의로우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에 바벨론 설화는 자기들끼리 다투고 있는 많은 신들에 대해 언급한다.
 (2) 성경에서 노아는 “의의 설교자”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노아가 다가오는 대홍수에 관해 백성들을 경계하고 그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바벨론 설화에서는 신들이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속였다.”
 (3) 성경 기사에서 중요한 부분인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언약이 바벨론 설화에서는 빠져 있다.
 (4)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작은 상이점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방주의 규격, 새를 내보낸 순서, 정박한 장소의 이름, 주어진 시간적 요소, 두 기사의 기타 특징 등에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기사의 유사점을 통해 우리는 두 기사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명백한 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주요 이론 세 가지를 다음에 소개한다:
 (1)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포로 기간 동안에 바벨론인의 설화를 취하여 자신들의 사고 방식에 맞게 변형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은 바벨론 포로기보다 거의 1,000년 전에 하나님의 영감 아래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2) 약간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두 번째 방도로서 바벨론인들이 히브리인들에게서 그 기사를 취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길가메쉬 서사시 사본들은 모세 시대보다도 여러 세기나 앞서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은 바르다고 볼 수 없다.
 (3) 셋째 견해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본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곧 두 기사 모두 궁극적으로 동일한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범세계적인 홍수와 한 가족의 구출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왔다. 바벨론인들이 이 설화를 기록할 때는 구전과 바벨론인들의 이교주의적 다신교 영향 때문에 내용상의 변조가 일어났다. 반면에 성경 기사는 영감 아래서 기록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신론적 저자의 순수하고 고양된 정신을 보여 준다.
 두 기사에서 관찰할 수 있는 대부분의 유사점과 상이점은 이상의 사실들로 설명된다. 홍수 후 가장 초기의 역사는 메소보다미아 지방이나 그 근처 지방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곳의 주민들은 먼 지방의 국가보다 홍수에 관해 더 잘 알았고, 상대적으로 더욱 순수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다른 요소로는 타지방에서보다도 메소보다미아에서 그것이 더 먼저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 기사에 비해서 월등한 것이 아니라 훨씬 열등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두 기사를 모두 읽어보고 비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바벨론 전승 속에는 성경 기사가 갖고 있는 도덕성이 거의 상실되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역사를 제공한다. 바벨론인들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전설로 바꾸어버렸다.
 1901년에서 1902년 사이의 겨울 동안 프랑스 발굴단이 유대인 여성 에스더가 바사 제국의 왕후가 된 곳인 성경상 수산(에 2:5~8등)의 페허에서 작업을 하던 중 세 조각으로 부서진 2.4미터 크기의 흑색 섬록암 기둥을 발견하였다. 그 기념석 전체에는 39단락에 걸쳐 3,624행으로 된 법률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법률들은 함무라비(Hammurabi)에 의해 집대성되어 이 돌 위에 공표된 것이다. 함무라비는 족장 시대인 BC 18세기에 바벨론 제국을 다스린 위대한 아모리 족속의 왕이다. 이처럼 고대 시민법을 집대성한 것이 발견되자 신학계는 엄청나게 큰 관심을 나타냈다. 모세 시대에 그처럼 고도로 발달된 제도가 존재할 리 만무하다는 이유로 모세 오경에 나타난 사법 제도가 공격을 받아왔었다. 그러나 함무라비법전은 모세 시대 이전에도 메소보다미아에 유사한 법전들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냈다. 성경의 사법 제도와 메소보다미아의 사법 제도를 주의 깊게 비교해 보면 메소보다미아의 사법 제도가 비록 이교 우상 숭배자들의 손안에서 변질되긴 했어도 궁극적으로 신적 입법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볼 수 있다.
 함무라비법전은 성경의 족장 기사들 속에 나타난 생명의 도가 여러 가지 면에서 족장 시대에 근동 지방에 존재했던 상황과 일치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려 자연적 수단으로는 후손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을 때, 종을 통해 후손을 얻고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자기 여종을 준 일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창 16:1~3). 그러나 그녀가 행한 일은 그녀의 이웃 국가에 흔히 존재했던 지극히 합법적인 일로서, 하녀는 첩의 위치로 격상되어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게 된다. 또한 하녀가 낳은 자녀들의 권리와 의무도 법으로 규정되었다(함무라비법전 144, 145, 170, 171조 참조). 하갈이 자기 주인에게 아이를 낳아줄 기미가 보였을 때 사라가 참지 못하고 하갈을 처벌한 것이 합법적인 권한 행사라는 사실도(창 16:4~6) 그 유명한 함무라비법전 제146조에 의해 입증된다. 이렇게 이례적으로 중요한 발견을 통하여 어떻게 족장 시대가 조명되었으며, 성경 기사들이 신빙성을 얻게 되었는지에 관해 예를 들자면 이외에도 많이 있다. 이 법전은 족장들이 전설적 인물이 아니라 혈육을 가진 인물들임을 증거하기 위해 메소보다미아의 땅에서 부활한 최초의 위대한 증언이다. 또한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그들의 생활 환경도 현재 알려진 사실들과 전적으로 일치함을 이 법전은 증거한다. 
 고등비평가인 앗수르학 학자 알프레트 예레미아스(Alfred Jeremias)는 함무라비법전의 사법 규정들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성경의 족장 기사에 반영된 관습들과 비교한 후에 다음과 같이 뛰어난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족장 기사들의 배경이, 문제시되는 기간의 고대 오리엔트 문명 상황과 그 세밀한 점에서까지 어떻게 일치되고 있는지 그 기념비를 통해 살펴보았다.... 벨하우젠은 족장들에 관한 기사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론적 입장에서 연구하였다. 이제 그것은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살았다면 오직 성경이 기술하고 있는 여건과 환경 속에서만 가능하다. 역사적 연구는 이런 사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벨하우젠은 자기 스스로가 한 말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Komposition des Hexateuch, 346). “만약 그것(이스라엘의 전승)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다른 어떤 가능성을 선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The Old Testament in the Light of the Ancient East [New York, 1911], 2:45).
 동일 영역에서의 훨씬 많은 증거들이 앞서 언급한 누지 발굴 때에 나오게 되었다. 한 문서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곤궁을 모면하기 위하여 양 세 마리를 받고 자기의 미래 유업을 팔았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자기의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를 퍼뜩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창 25:33). 다른 누지 본문에 의하면 하란에서 야곱의 경험, 자기의 외삼촌인 라반과의 관계 등에 필적할 만한 예들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그것들은 레아와 라헬처럼 모든 딸은 결혼할 때에 아버지로부터 결혼 지참금의 일부로서 하녀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창 29:24, 29). 누지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는 당대에 존재했던 이상한 풍습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구비하게 되었으며, 또한 족장 기사들이 애매모호한 전승이나 전설이 아닌 실제 사실에 기초한 것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W. F. 올브라이트는 족장 시대를 조명해 주는 이상의 사실과 기타 고고학적, 본문적 자료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진술을 했다.
 “창세기 11~50장에 나타난 각각의 사항들을 후대의 창작으로 보거나, 왕정 시대 후기의 저자들이 사실상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는 사건과 상황들을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록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탁월한 신학자들 가운데 있다.
 지난 세대 동안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견들을 통하여 이런 상황은 바뀌었다. 연로한 학자들 중 소수의 완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족장 전승의 본질적 역사성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급속히 축적되고 있는 것에 감동받지 않는 성경 역사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The Biblical Period”, in The Jews; Their History, Culture, and Religion, ed. Louis Finkelstein [New York, 1949], 3).
 메소보다미아에서 이루어진 발견들을 통하여 명확하게 조명된 또 다른 시대가 있다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열왕 시대이다. 앗수르의 명각에 최초로 언급된 이스라엘 왕은 엘리야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인 아합이다. 살만에셀 Ⅲ세는 아합왕이 카르카르에서 2,000대의 병거와 1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당시에 동맹을 맺은 다른 왕들과 함께 앗수르 왕과 교전하였다고 기록했다. 살만에셀 Ⅲ세는 후에 또한 기록하기를 이스라엘의 또 다른 왕인 예후가 조공을 바쳤다고 하였다. 앗수르 명각에 언급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기타 왕들로는 므나헴, 베가, 호세아 등이 있다. 마지막에 언급된 왕 아래서 사마리아는 정복을 당하여 그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 사건도 어떤 앗수르 왕이 자기의 연대기와 기념비에 기록해 두었다.
 앗수르 명각에 등장하는 유다의 왕들로는 요아스, 아사랴, 히스기야, 므낫세가 있다. 앗수르의 산헤립은 BC 701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포위 사건에 대한 설명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마치 새장 속에 새를 가두듯이 유다의 왕(히스기야)을 그 수도에 가두어 두었다고 자랑하면서도 그는 예루살렘이나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는 주장을 감히 못하고 있다. 후에 다시 한 번 유다를 침략하였지만 그의 군대는 수치스럽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 사실은 구약에 3회나 언급되고 있다(왕하 19:35; 대하 32:21; 사 37:36). 산헤립은 자신의 군사적 업적을 자찬하면서도 팔레스타인에서 자기의 군대가 낭패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젊은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잡혀간 사실은 느부갓네살 제국의 수도인 바벨론에서 나온 수많은 영수증에 의하여 확증된다. 이 서판들은 왕과 왕자들이 궁중 창고로부터 기름을 할당받았다는 사실을 단순히 기록하고 있다. 기타 수많은 본문들은 유대인들의 포로 기간과 그 이후의 회복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지난 세계 대전 동안에 베를린 박물관에서 한 서판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모르드개를 언급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는 성경에 수산으로 등장하는 수사에서 크세르크세스 궁정의 고관이었다. 이것을 통하여 에스더서는 가공적인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인물들에 대하여 취급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개인적 사무 문서들까지도 성경 기사를 조명해 준다. 닙푸르에서는 무라슈 아들들(Murashu Sons)이라는 상점에서 모아놓은 거대한 사업상의 회계 기록들을 입수하게 되었는데, 이 상점은 유대인들과 폭넓은 거래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바사 왕들의 통치하에서 부와 명예를 얻게 된 수많은 인사들이 있었다. 이것은 포로 사건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부와 명성을 누리는 위치로 나아갔다는 성경의 기술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성경을 조명하는 앞에 언급된 발견 예들은 성경이 다시 살아나도록 한 메소보다미아에서 나온 대량의 자료들과 비교해 볼 때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 성경 속에 언급된 앗수르, 바벨론, 바사 등의 통치자들은 당대의 문서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역사에 관하여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살만에셀과 디글랏-빌레셀, 느부갓네살과 오랫동안 상실되었던 벨사살, 고레스와 다리오 대왕,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기타 많은 왕들의 명각을 갖고 있다. 느부사라단(왕하 25:8)이나 네르갈사레셀(렘 39:3)과 같은 성경상의 관리들의 이름도 그들 시대의 공문서에 등장하고 있다. 

 Ⅵ. 고대 팔레스타인의 부활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은 손도 대보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세기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삽들이 팔레스타인의 폐허화된 언덕들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메소보다미아와 애굽에서 고대의 보물들이 출토되기 시작한 이후로도 사람의 수명에 해당하는 세월 이상이 지난 후에야 고고학자들이 삽을 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어찌하여 그들은 족장들과 선지자들의 나라였으며, 또한 다윗, 솔로몬, 그리스도의 고향이었던 이 땅을 파헤치는 데 머뭇거렸단 말인가? 성경 고고학자들에게 팔레스타인은 가장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간주되지 않았는가? 이 땅이 성경 기사들을 보강해 주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시켜 줄 가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해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단 말인가?
 초기의 고고학자들이 팔레스타인을 파헤치기 꺼려한 데에는 쉽게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부요하고 위대한 대제국의 중심이 되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철저하게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제외하고는 어떤 기념될 만한 건물도 없으며, 테베, 멤피스, 니느웨, 바벨론, 수사, 아덴, 로마와 같은 거대한 도시들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솔로몬 치세 동안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 땅은 가난하게 지내왔고, 또한 여러 족속들로 나누어져 있던 것이 보통이었다. 같은 규모의 다른 어떤 지역들보다도 이 지방은 더 많은 전쟁과 멸망을 맛보았던 것이다. 또한 다습한 기후 때문에 상하기 쉬운 물질들이 수천 년간에 걸친 자연의 파괴력을 감당하고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기대할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에 상대적으로 엄청난 고고학적 빈곤 상태가 초래된 또 다른 이유로는 유대인들의 종교를 들 수 있다. 주변 국가에서는 왕들이 자신들의 명성을 오랫동안 지속시키고자 수많은 종류의 기념물들을 세웠다. 이러한 기념물들을 이스라엘인들의 땅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율법에 의하여 형상을 만들거나 기념물을 세우는 일을 금지당하였을 뿐 아니라(출 20:4; 레 26:1; 신 7:5; 16:22), 그러한 것이 발견되기만 하면 모두 파괴하도록 경고받았던 것이다. 충성되지 못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 자기들의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그러한 기념물들을 세웠다고 가정하더라도 요아스와 히스기아 같은 왕들이나 느헤미야 총독과 같은 사람들이 선대에 세워 놓은 모든 기념물들을 파괴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고대 히브리 명각과 함께 발견된 유일한 기념비적 돌은 고작해야 이방 왕에 의해 세워진 모압 돌(Moabite Stone)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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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 어떤 발굴가도 팔레스타인에서 볼 만한 것을 발견하리라고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십 차례에 걸쳐 시행된 이 땅에서의 발굴 작업은 고고학자들의 이러한 두려움이 전적으로 사실이었음을 입증하였다. 팔레스타인은 투탄카멘이나 우르 왕들의 무덤이 쏟아 놓은 것과 같은 보물을 쏟아 놓지 못하였다. 또한 발굴가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숫자적으로 애굽이나 메소보다미아에서 내놓은 만큼의 명각도 내놓지 못하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도 선풍적 인기를 끌 만한 것들이 발견될 소지는 있었다. 마침내 근대에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2,000년이나 묵은 성경 사본들과 기타 사본들, 또한 동판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처럼 굉장한 발견물들이 팔레스타인의 땅과 동굴들이 우리를 위해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보여 주는 작은 표본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전승의 성지에 집중되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 예루살렘의 성묘교회(聖墓敎會)와 같은 기독교의 교회들은 그러한 관심을 가장 잘 표현한 기념비적인 것이다. 그러나 여러 세기에 걸쳐 팔레스타인을 오갔던 십자군이나 그리스도인 순례자들 중 그 어떤 사람도 고대 유적지에 대하여 과학적 관심을 가졌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이 지방에 대한 과학적 탐사 활동은 1838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당시에 미국인 교수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은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면서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여러 장소들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후일에 콘더(Conder)와 키취너(Kitchener)가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Palestine Exploration Fund)의 후원 아래 대규모 지형 조사를 완수하도록 하는 굳건하고도 견고한 토대가 되었다.
 실제적인 발굴이 시작되기 이전에 몇 가지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1868년 독일인 선교사 클라인(Klein)이 그 유명한 모압 돌(메사 돌)을 모압 땅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학자들의 손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의심을 품은 아랍인들이 그 돌을 불에 달군 후 차가운 물을 부음으로써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불완전하기는 하나 이것을 탁본해 둔 것이 하나 있었다. 후에 프랑스의 학자 클레르몽-간노(Clermont-Ganneau)가 여러 조각을 수집하여 그 현무암 판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기념비는 모압 왕 메사의 승전담(勝戰談)을 포로 시대 이전의 히브리어로 34행에 걸쳐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히브리어로 된 명각들 중에서 가장 긴 문건에 해당한다.
 1880년에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이 우연히 이루어졌다. 당시에 몇 명의 아랍 소년들이 BC 8세기에 히스기야왕이 실로아(실로암) 물을 예루살렘 도성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암벽을 뚫고 파낸 약 540미터에 달하는 터널 벽에서 히브리어 명각을 하나 발견했던 것이다. 공사 절차를 기술하고 있는 이 명각은 터널을 판 사람들에 의해 그 벽에 새겨진 것이었다. 이후에 이것은 발굴되었으며 현재는 이스탄불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은 3대 종교의 성도(聖都)인 예루살렘에서 과학적 발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발굴하는 것보다 더 헛수고가 될 일이 없다는 사실이 곧 알려졌다. 과거에 그 도시는 철저한 파괴와 재건의 역사를 반복하였기 때문에 그 퇴적물들 속에 가치 있는 어떤 것이 남아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고대 건축물들의 유적지를 발견한다고 해도 후세의 건축활동을 통해 너무 많이 혼란스럽게 되었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이 그것들을 해석하여 건전한 결론에 도달하기란 지극히 힘든 일이 된 것이다.
 박물관에 한 자리 차지할 만한 물건이 예루살렘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자들은 아무리 작은 증거물이라도 끈기 있게 수집하여 그 도시의 역사와 관련된 수많은 문제점들을 말끔히 해결하고, 또한 고대 성벽의 위치를 거의 확립할 수 있었다.
 1890년, 플린더스 페트리는 유대 서남부의 텔 엘-헤시(Tell el-Hesi)를 발굴하였다. 그는 이곳이 고대의 라기스 유적지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그곳이 확실하게 어디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대 에글론의 유적지라고 믿을 만한 좋은 증거가 있다. 다른 수많은 팔레스타인 유적지에서 실망스런 결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페트리는 얼마 동안 작업을 하다가 애굽으로 되돌아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발굴 작업은 훨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 엘-헤시에서 행한 그의 작업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혀 명각을 찾아볼 수 없는 고대의 폐허 지역에서도 고고학자들이 시대를 측정할 수 있는 체계를 개발하였기 때문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동양인은 모두 다양한 목적으로 토기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유적지마다 부서진 토기들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다. 토기는 쉽게 깨지기 마련이며, 일단 깨진 토기는 대부분 버리게 된다. 실질적으로 파괴하기가 불가능한 이 조각들은 숙련된 고고학자들에게 매우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토기의 질료, 제조 기법, 예술적 도안뿐 아니라 토기의 모양도 자주 변하기 때문이다. 페트리는 각층마다 깨진 토기 조각이 다름을 보았다. 그는 각각의 토기 조각을 조심성 있게 기록하고 서로를 비교함으로써 토기 연대학을 처음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1890년 페트리에 의해 이 방법이 독창적으로 시작된 이래 이제는 엄청나게 많이 다듬어져 고고학자들은 이 믿을 만한 수단을 사용하여 고대 유적지의 연대를 매기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팔레스타인 고고학을 논할 때 사용되는 몇 가지 술어, 예를 들면 텔(tell)과 “층”(level)을 설명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텔이란 팔레스타인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언덕을 일컫는데 인위적으로 쌓여진 그 형태를 보고 쉽게 분간할 수 있다. 이 속에 고대 도시의 폐허가 여러 세기에 걸친 모래와 폐물더미에 뒤덮인 채 자리잡고 있다. 고대인들은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고지에 도시를 짓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축적된 폐물더미뿐 아니라 연이은 폐허 때문에 그 높이는 더욱 높아졌다. 무너진 집을 다시 지을 때는 그것을 헐어버리고 햇볕에 말린 벽돌을 그냥 메워서 평평하게 하였다. 다음에 옛 터전 위에 새 집을 건축하였다. 빈번히 발생하는 전쟁으로 어떤 도시가 멸망하면 온 도시가 동일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폐허를 고르게 하기 위해서 전체가 수 미터나 높아지고, 이전 도시를 메운 그 위에 새 도시가 자리잡게 된다. 여러 차례의 파괴와 재건을 거치는 동안 도시는 지을 때마다 매번 높아지며, 어떤 경우에는 현저하게 높아지기도 한다.
 발굴가들은 자신들이 파헤치는 구별된 층들(levels 또는 strata)에 의하여 그 도시 역사의 각 기간을 구별할 수 있다. 각층 모두 이전 것이나 이후의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텔을 우리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케이크에 비교할 수 있다. 최상부 층은 가장 나중 시기의 점유층이며 최하부 층은 가장 이른 시기의 점유층이다. 그러므로 고고학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장 나중 시기의 점유층을 발굴하는 것이며 대개 이들은 아랍 촌락의 폐허일 수 있다. 이것을 제치고 나면 그 이전 시대인 비잔틴 시대에 번영했던 도시 유적지가 나오고, 그 아래층으로 가면 그보다 전 시대인 로마 시대의 유적지 등이 나온다. 고고학자들은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후기 시대의 것을 제치고 난 다음에야 구약 시대의 층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지만 후기 시대의 것도 이전 시대의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상의 이유 때문에 연구하고 기록해야만 한다. 한 예로 므깃도의 경우에는 팔레스타인 역사의 아주 이른 시기에 도달하기까지 모두 합해서 무려 20개 층이나 제쳐내야 했다. 고대 벧산(벧스안)은 18개 층이나 갖고 있었으며, 그 총 두께는 21.8미터에 달하였다.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이뤄진 여러 발굴 작업에 관해서는 지면상 논할 수 없고 여기에서는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 다루고자 한다. 그때는 실험적인 기간으로서 고고학자들이 시행착오를 통하여 배우던 시기이다. 그때는 팔레스타인 고고학의 유아기에 해당하여 발굴 결과 내린 대부분의 결론들은 그 시대 이후로 다시 수정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소에서 몇 가지 중요한 발견이 있었는데 게셀이 그 한 예다. 게셀은 솔로몬이 애굽인 장인에게서 결혼 예물로 받은 것이다. 또한 다아낙(Taanach)을 들 수 있는데, 이곳은 가나안 통치자의 문서보관소가 위치해 있어서 설형 문자 사본이 많이 출토되었다. 므깃도에서의 작업을 통해서도 가치 있는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사마리아의 경우에는 애굽 고고학자로서 경험이 풍부한 라이스너(Reisner)와 피셔(Fisher)가 주의를 기울여 꼼꼼하게 발굴하였다. 이 작업을 통하여 글씨가 새겨 있는 질그릇 또는 토기 조각 60점 정도가 출토되었다. 애굽산 파피루스가 값이 너무 비싼 데 비해서 깨진 토기 조각들은 아주 흔하기 때문에 간단한 메모나 영수증을 기록하는 데 이 토기 조각들을 사용하였다. 정부 문서에 속하는 이 60여 점의 질그릇 조각은 이스라엘 열왕 시대에 기름과 술에서 거둬들인 세금 기록이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게 되자 이때야말로 더욱 큰 사업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고고학회들이 매우 활기를 띠며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기타 수많은 기관들도 대규모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런 기관의 예로는 시카고 대학교의 동방학회(Oriental Institute)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물관 등이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은 요단 계곡 상부에서 인상적으로 보이는 작은 언덕을 파헤침으로 벧산을 발굴하였다. 이로써 이 기관은 성공적이고 중요한 팔레스타인의 “발굴” 작업을 장기 연속으로 진행하는 일에 돌입하였다. 출애굽 전후로 애굽인들의 요새와 수비대의 본거지 역할을 한 벧산은 애굽인들과 가나안인들의 신전 폐허뿐 아니라 애굽인들의 기념비를 많이 갖고 있었다.
 이스르엘 평야의 강력한 가나안 족속 요새인 므깃도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새로이 발굴하였다. 다른 가치 있는 자료들 중에는 바로 시삭이 르호보암 왕 5년에 팔레스타인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 도시에 세운 승전비 단편이 있다(왕상 14:25, 26). 이곳에서 발견된 중요 발견물로는 그 지역 수비대 사령관과 지방장관의 거처, 그리고 아주 넓은 마굿간이 있다. 이 마굿간은 이전에 솔로몬의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은 후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아마 아합 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므깃도는 잘 정비된 수비대 주둔 도시로서 500필의 말을 갖춘 왕립 전차 부대가 있던 곳이다. 이 사실은 열왕기상 9장 15~19절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이 구절에서 므깃도는 솔로몬이 건축한 병거성과 마병의 성들 중에 언급되어 있다. 좀 더 깊은 층에서는 예술적으로 깎아 만든 상아 액자들과 어떤 가나안 군주의 금은 보석들이 출토되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애굽 고고학자들이 출토해내곤 하는 보석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올브라이트와 카일(Kyle)은 네 차례에 걸쳐 고대의 기럇 세벨로 추정되는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에서 중요한 발굴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 유적지에서는 박물관으로 보낼 만한 중요한 물품들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각층들이 차례대로 잘 보존되었고, 또한 가장 권위 있는 팔레스타인 고고학자의 지휘하에 발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작업은 팔레스타인 발굴의 표본이 되었다. 제1,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기타 많은 장소에서 발굴 작업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발견이 있었던 유적지와 더불어 그 장소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벧술에서는 바벨론 유수 이후 시대 초기에 헬라의 은전이 통용되었다는 증거가 나왔다. 이것은 에스라서의 저작 연대를 후기로 잡는 고등비평가들의 주장과 상반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리오 Ⅰ세 때에 비로소 은전이 도입된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이 책은 다리오 Ⅰ세 이전에도 이미 그러한 은전이 사용되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스 2:69). 벧세메스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의 알파벳 본문이 몇 점 출토되었다. 이로써 BC 20세기에도 문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또 하나 확보된 것이다. 기브아에서 사울왕의 작은 성채를 발굴하였다. 또한 사사 시대 동안 회막이 있던 실로를 발굴하였다.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대해 더욱 많이 밝혀준 장소로는 벧엘, 엣-텔(et-Tell, 아이로 확인되었지만 잘못된 것 같다), 텔 엔-나스베(Tell en-Nasbeh, 아마 미스바일 것이다), 세겜 등이 있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서남부에서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원수였던 블레셋 족속의 문화를 조명하는 중요한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성경 연구가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끄는 장소 중 하나는 여리고이다. 여러 해에 걸쳐 이 장소에 대한 일반적 관심은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1930년에 존 가스탱(John Garstang)은 일찍이 젤린(Sellin)과 바칭어(Watzinger)가 발굴(1907~1909년)하였던 곳을 재개봉하였다. 여호수아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층에서 불탄 도시 하나가 성벽이 무너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 위에는 가옥들이 건축되어 있었다(참조 수 2:15). 독특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이 벽이 무너진 시기로 잡은 연대(BC 1400년경)는 1950년대에 이르러 영국인 여성 캐쓸린 M. 케년(Kathleen M. Kenyon) 박사의 발굴단이 찾아낸 발굴물들로 인하여 여러 세기 이전 시대의 것으로 앞당겨졌다. 이 발굴에서 보다 후기에 속하는 한 채의 가옥 벽과 마루 일부가 드러났으며, 또한 화덕과 작은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가나안 여인이 사용하던 부엌의 일부로서 그 여인은 여호수아 군대의 나팔 소리를 듣고 화덕 곁에 그 항아리를 떨어뜨리고 도망갔을 것이다”(Kathleen M. Kenyon, Digging Up Jericho, 263).
 그 시기의 도시 전체는(또한 그보다 이른 시기 층들의 일부도) 침식당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후에 사람들이 그 위에 건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서진 진흙, 벽돌, 구조물들은 보존되지 못하였다.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여러 세기 동안 그 도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수 6:21). 그렇기 때문에 구조물들은 겨울 동안 내리는 많은 비에 완전히 씻겨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 한 채의 가옥과 도시 밖의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BC 14세기에 사람들이 여리고에서 살았음을 지적해 준다.
 아카바 만에 있는 텔 엘-켈레이페(Tell el-Kheleifeh)는 에시온게벨 혹은 그 교외인데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넬슨 글럭이 발굴하였다. 이곳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방황하며(신 2:8) 거쳐간 장소이며, 또한 솔로몬의 오빌 원행단(遠行團, 왕상 9:26~28)이 출발했던 주요 항구로서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이전에 에돔에서 솔로몬의 풍부한 구리 광산을 발견한 적이 있는 글럭은 에시온게벨 유적지가 솔로몬 당시의 커다란 상업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흔적을 발견하고 매우 크게 놀랐다. 이곳에서는 담장으로 둘러진 채 잘 방비된 건물 하나가 발견되었다. 맨 처음에 이 건물은 제련소로 간주되었지만 지금은 창고 또는 곡물 저장고로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달시스의 배” 또는 “제련 선단”이 출항했음이 분명하다(창 10:4 주석 참조). 속담처럼 되어버린 솔로몬의 부귀(참조 왕상 7:46, 47; 10:21, 27)도 폐허화된 이 무역 중심지를 발굴한 다음에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 연합 발굴단은 사마리아에서 또 다른 중요 발굴 사업을 벌였다. 고고학자들은 아합의 상아궁(왕상 22:39)에서 출토한 공교한 모양의 상아 액자 단편들을 보고 아주 크게 만족하였다. 이것들을 통하여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시기로부터 별로 오래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이스라엘이 성취한 예술적 업적을 최초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솔로몬이 성전과 궁전들이 어떤 유형으로 치장했는지에 대해 추측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남부의 요새 중 하나인 라기스는 고고학자들의 보고(寶庫)였다. 올브라이트는 텔 엣-두웨이르(Tell ed-Duweir)가 오랫동안 망각되어 온 도시일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1932년부터 시작된 발굴 결과 이 제시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 유적지에서는 최초기의 히브리 알파벳 문서 몇 점뿐 아니라 오늘날 유명한 예레미야 당시의 라기스 편지 21점이 나왔다. 이 편지에는 어떤 군대 장교가 라기스에 있는 자기 상관에게 보낸 전갈이 포함되어 있다. 유다가 멸망당하기 직전, 곧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군대 수중에 들어가기 직전에 기록된 몇 편의 이 편지는 그 비극의 현장이 어떠하였는지 희미하게 엿볼 수 있도록 하며 여러 곳에서 예레미야서를 확증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량한 유다 광야의 동굴들에 관해서 간략히 언급해야겠다. 이 동굴들 속에는 수많은 가죽 두루마리 구약과 기독교 시대 전후의 기타 사본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들 문서가 1947년에 발견됨으로써 우리는 알고 있던 최고의 히브리 사본들보다도 1,000년이나 오래된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한 사항은 본서의 「구약의 언어, 사본, 정경」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줄이기로 한다.
 1950년경부터 성지 발굴은 급속히 가속화되었다. 하솔, 세겜, 기브온, 아스돗, 브엘세바, 아랏, 가이사랴 등에서 이뤄진 고고학적 작업은 놀라운 결과를 거두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다윗이 여부스 족속에게서 빼앗은 성곽의 일부가 드러났다. 이 성곽은 히브리 열왕 시대의 서쪽 성곽의 일부로서 구약 시대의 성읍 규모를 최초로 알려 주었다. 또한 AD 70년에 티투스가 쳐부순 그리스도 당시의 주요 구조가 드러났다. 요단 동편과 사해에서는 밥 에드-드라(Bab edh-Dhra)뿐 아니라 에돔 족속의 여러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곳은 “들의 성들...곧 롯의 거하는 성”에 해당하는 지역일 것이다. 아모리 왕 시혼의 수도인 헤스본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BC 12세기로부터 AD 14세기까지의 유적들을 발굴했는데, 이 중에는 아가에 언급된 “헤스본의 연못”(아 7:4)이 포함되어 있다.

 Ⅶ. 팔레스타인 고고학과 성경

 성경 연구가들은 팔레스타인 고고학의 결과들에서 아주 큰 유익을 얻었다. 가나안 족속과 히브리 민족의 성읍 폐허들은 성곽, 궁전, 공공 건물과 개인 가옥의 유적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역사를 지닌 팔레스타인의 여러 시기에 건축술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했다. 우리는 축성법, 가정과 성읍의 위생 환경을 연구할 수 있으며,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일하였는지, 또한 그들이 죽으면 어떻게 매장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황폐한 언덕 속에서부터 빛을 보게 된 수천 가지 물품들은 그것을 사용했던 고대 여러 족속의 문화를 통찰할 수 있도록 했다. 무기와 기물, 진흙, 금속 또는 돌로 만들어진 그릇, 이 모든 것은 고대 히브리 민족, 블레셋과 가나안 족속의 일상 생활을 우리에게 해석해 준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수천 가지 물품은 모두 성경 시대에 관한 정보를 엄청나게 많이 제공해 주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발굴된 것들은 이스라엘 후기 시대뿐 아니라 족장과 사사 시대에도 이미 필기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초기 시대에는 대부분 설형 문자가 사용되었는데 수백 점의 아마르나 편지들이 이를 증거한다. 이것들은 BC 14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애굽으로 보내진 후 왕립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었다. 게셀, 텔 엘-헤시(Tell el-Hesi), 다아낙, 세겜, 사마리아 등 팔레스타인 자체 내에서 발견된 기타 서판들도 아마르나 편지와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본문들로서 이미 필기법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확증해 준다. 그러나 초기 형태의 알파벳 문자로 기록된 서판들도 출토되는데, 이것들은 시내 반도의 구리 광산 지역에서 발명된 것과 아주 닮았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그 족속이 설형 문자보다도 훨씬 편리한 이 문자를 필기 시에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발전시키기 위하여 거듭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반상형적 알파벳 문자로 기록된 이러한 본문들은 라기스, 텔 엘-헤시, 벧세메스, 세겜, 므깃도, 게셀, 텔 엘-앗줄(Tell el-‘Ajju1)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이전 시대에 고등비평가들이 펼쳤던 주장이 무효화되었다. 그들은 초기의 히브리인들이 알파벳을 이용한 기록 방식을 결코 알지 못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히브리 알파벳은 분열왕국 시대 또는 포로기 이전 시대에 등장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견문이 넓은 학자는 이러한 주장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유적지에서 나온 수많은 자료를 통하여 고대 가나안 족속의 종교적 관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곳에서 신전들을 발굴하였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므깃도, 벧산, 라기스의 것을 들 수 있다. 게셀에서는 정교하게 건축된 산당을 발견하였는데 그 아래에는 기도 동굴이 있었다. 늘어선 신성한 기둥들, 파괴하도록 이스라엘 민족이 명령받은 우상숭배물들, 제단, 기타 가나안 족속의 예배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개인용 제단, 향로, 제물을 바치던 흔적들, 뱀 숭배의 증거, 자식 제사, 기타 가증한 관습들도 마찬가지이다.
 앞에 언급한 사마리아 궁정 창고에서 나온 수많은 토기 단편들도 성경을 확증해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세금 기록에 나타난 많은 인명을 보면 바알 숭배와 이스라엘의 참 신앙이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비바알, 바알자마르, 바알라자케르, 바알메오니, 메리바알, 바알라 등은 잘 알려진 이름들로서 바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성호인 여호와를 단축시킨 이름들로는 예다야, 여호야다, 스마랴 등등이다. 이들 인명은 아합 시대의 신앙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당시에 엘리야는 바알 숭배와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또한 이 이름들은 엘리야가, 하나님을 진실되게 경배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왕상 19:18)이 진실임을 증거한다. 이들 사마리아 토기 단편을 통하여 자기 자녀들에게 바알과 연관된 이름을 지어준 부모들이 있었던 것과 동시에 자기 자녀들에게 여호와와 관련된 이름을 지어준 부모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라기스에서 나온 21편의 편지는 유다 왕 요시야의 종교개혁 이후에 나왔다. 이것들은 유다의 최후 몇 달 동안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데 사마리아 세금 기록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름들을 지었을 당시의 종교 상황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히브리 인명은 그렇게 이름을 지은 사람들의 종교적 신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인명 가운데 대다수가 여호와의 이름과 관련을 맺고 있는데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그 좋은 실례라고 볼 수 있다. 그 이름들은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모든 이방신들을 그 나라로부터 몰아냈던 요시야의 종교개혁 영향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라기스 편지에서는 바알이나 이방의 신과 관련된 인명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유다의 참 하나님이신 엘로힘과 여호와와 연관된 이름만이 이 문서들에 나타나고 있다.
 성지(聖地)는 이상의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하여 성경의 신뢰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고대에 팔레스타인은 구약에 기록된 대부분의 역사가 이루어진 무대 역할을 하였으며, 지금은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들, 비평가들, 회의주의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증거들을 제공하는 터전이 되고 있다.

 Ⅷ. 대(大)수리아의 부활

 예나 지금이나 수리아란 지명은 여러 곳을 가리키기 때문에 먼저 본 장에서 말하는 수리아가 어느 곳인지 지리적 한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 장에서 말하는 수리아는 팔레스타인의 북부 접경 지대와 유브라데강의 크게 만곡된 지역 사이에 있는 땅이다. 이곳의 서쪽 국경은 지중해이며 동쪽 국경은 아라비아 사막이다. 이곳은 레바논과 안티-레바논으로 알려진 두 개의 큰 산맥과 더불어 레바논을 포함한다. 아름다운 헤르몬 산은 후자의 산맥에 속한다. 수리아의 2대 주요 강인 오론테스 강과 리타니 강은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 양대 산맥 사이를 지나 하나는 북부 해안으로, 다른 하나는 수리아의 남부 해안으로 흘러들어간다. 고대에는 길게 늘어진 비좁은 해안을 따라 시돈, 두로, 비블로스, 우가리트 등의 항구가 발달하였고 내륙의 2대 강을 끼고 가데스, 하맛, 리블라, 카트나 등이 발달했다. 수리아에서 가장 이름난 몇몇 도시는 사막의 오아시스로서 다메섹, 알렙포, 팔미라 등이 그 예이다.
 여타의 근동 지방에서보다도 수리아에서는 고고학적 활동이 훨씬 뜸하였다. 그렇지만 일단 발굴을 하기만 하면 팔레스타인보다도 훨씬 풍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19세기에 이루어진 몇몇 소규모 발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주요 발굴 작업이 1,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이루어졌다. 본 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언급하기로 하겠다.
 비블로스(Byblos)에서는 몽테(Montet)가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그 후로 뒤낭(Dunand)이 1939년까지 발굴 작업을 벌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고대에 비블로스는 진귀한 레바논산 백향목의 주요 수출항이었다. 헬라인들은 고대의 주요 필기 재료인 애굽산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베니게 상인들을 통하여 비블로스에서 구입하였기 때문에 그 두루마리를 비블로스라고 불렀다. 이 명칭으로부터 책 중의 책을 지칭하는 바이블(Bible)이란 낱말이 파생되었다.
 수많은 왕릉이 풍부한 소장품을 갖춘 채로 비블로스에서 발견되었다. 발굴 도중에 출토된 다른 예술품들과 더불어 이것들은 베니게의 예술과 공예에 대하여 알 수 있도록 한다.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솔로몬 성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내부 장식 책임자는 히브리계 베니게인이었기 때문이다(참조 왕상 7:13, 14).
 더 나아가 베니게인들의 명각들이 비블로스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BC 제2천년기 말엽에 보통 베니게어로 알려진 문자로 기록되었지만 사실상 이것들은 포로 이전 시대의 히브리어였다. 이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히브리어의 발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시내 반도에서 발견된 최초기의 알파벳은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형태의 과정을 거쳐, 후기 베니게와 히브리 명각에 이르기까지, 단절됨 없는 상태로 포로 시대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성경에서 수없이 언급하고 있는 도시인 고대 두로의 옛 항구 설비를 잠수부들이 조사하였다. 오론테스 강 위의 카트나(Qatna)에서는 힉소스족의 요새가 발견되었고, 작은 신전에서는 본문들을 수집해 놓은 것이 발견되어 히브리어 성경의 언어학적 의문 몇 가지를 깨끗이 씻어 주었다. 트리폴리, 베이루트, 시돈 등등의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발굴 작업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관심을 끈 발굴 작업이 있다면 그것은 라스 샴라(Ras Shamra)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곳은 고대의 우가리트로서 1929년 이래로 클로드 F. A. 셰퍼(Claude F. A. Schaeffer)가 발굴하였다. 가나안 북부의 항구 도시인 이곳은 BC 13세기에 파괴된 이래 한 번도 재건된 적이 없다. 따라서 그 폐허 속에는 중요한 자료들이 수없이 많이 묻혀 있어서 귀중한 정보를 한없이 쏟아내고 있다. 라스 샴라 어디에서든지 삽자루를 대기만 하면 중요한 것들이 나왔다. 바알과 다곤 신전, 지방 군주의 궁전과 애굽인 관리들의 명각을 발굴해냈다. 메소보다미아의 설형 문자 본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수리아와 메소보다미아, 헷 왕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는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설형 문자 본문으로 된 점토판이 수백 점이나 나온 것이다. 1929년에 샤를르 비롤로(Charles Virolleaud)가 최초로 발견된 본문들을 출판하자 독일의 바우어(Bauer) 교수와 프랑스의 도름(Dhorme) 교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시간에 이 문자를 해독하였다. 그 이후 동일 문자로 된 본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심지어 팔레스타인에서도 두 개나 나왔다. 우가리트 문헌을 연구하는 학도들은 오늘날 문법책, 사전, 색인, 훌륭하게 간행된 본문과 번역집 등 모든 언어학적 보조 자료들을 이용할 수 있다.
 이들 본문이 갖는 가장 큰 중요성은 이들이 고대 히브리어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BC 제2천년기 중엽의 가나안 방언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본문 대부분은 가나안의 신들과 종교에 대한 기사를 취급하고 있는 신화적 성격의 것이기 때문에 매우 큰 유익을 가져다 준다. 이것들은 성경 연구가들이 성경에서 해답을 발견하지 못한 고대 가나안에 대한 의문들을 상당히 많이 풀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바알, 아낫, 엘, 다곤, 기타 신들에 관하여 가나안 족속들이 믿었던 바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신은 충격적으로 비도덕적이며 피에 굶주려 있다. 누구든지 이스라엘 민족의 단순하고 높은 수준의 종교와 가나안 족속의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라스 샴라 문서와 그들의 뱀 숭배, 인간 제사, 음탕한 제전 의식 등에서 볼 수 있는 이교 신앙은 가나안인들의 종교와 도덕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지적한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도덕과 신앙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들 족속을 멸절시키도록 명령하시는 일이 필요했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종교적 개념을 세상에 전해 주시고자 경영하셨던 것이다.

 Ⅸ. 고대 아나톨리아의 부활

 흔히 소아시아라 일컫는 아나톨리아는 성경을 조명하는 자료들을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은 못했지만 그곳에서 이뤄진 고고학적 활동을 간단히 언급하겠다.
 성경이 헷 족속에 관하여 언급한 것 외에는 그들에 관하여 전혀 지식을 갖지 못했던 시대가 있었다. 비평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오류로 입증될 것이란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헷 족속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성경에 나타난 “헷 왕들”은 우화와 신화의 영역에 속한 인물들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1879년 이후에 이 모든 상황은 바뀌었다. 당시에 A. H. 세이스(A. H. Sayce)와 W. 라이트(W. Wright)는 북부 수리아와 아나톨리아에서 발견된 이상한 상형 문자 명각들이 오랫동안 잊혀졌던 헷 족속의 기념비들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명각들을 해독하기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노력했으며 그때 이후로 많은 것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헷 족속이 BC 1600년부터 1700년까지 이것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이것들은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1947년에 가서야 보세르트(Bossert)가 베니게어와 헷 상형 문자로 된 이중 언어 명각을 카라테페(Kara-tepe)의 길리기아 유적지에서 발견하였다. 이때부터 그 신기한 문자와 언어를 해독하는 작업이 신속히 진행되었다. 역사가들과 성경학자들은 고대 세계에 대하여 엄청나게 많이 알려 준 다른 고대 국가들의 명각처럼 헷 족속의 상형 문자 명각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기를 큰 기대를 갖고 기다리고 있다.
 1906년부터 1912년까지 후고 빙클러(Hugo Winckler)는 헷의 수도 핫투샤쉬(Hattushash), 즉 오늘날의 보가즈쾨이(Bogazko..y)를 발굴하였다. 그는 설형 문자로 기록된 헷의 왕궁 문서들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이 문자는 헷 족속이 상형 문자 체계와 아울러 부가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체코의 학자 흐로즈니(Hrozny)가 1915년에 헷의 설형 문자를 해독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보가즈쾨이에서 발견한 문서들을 번역해내고 있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헷 족속에 대하여 우리는 굳건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1860년판 영국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에는 헷 족속을 한 항목에서 여덟 줄로 다루는 데 그쳤지만, 1947년판에서는 두 항목으로 나누어 열 페이지 전체에 걸쳐 다루었다. 그 속에는 헷 족속의 역사, 문화, 종교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솔로몬과 교역을 했던 북부 수리아의 헷 도시들(왕상 10:29)이 발굴되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독일(1888~1902년)과 영국(1911~1914, 1920년)이 각각 발굴한 젠지를리(Zenjirli)와 갈그미스(Carchemish)가 있다. 아람과 헷의 명각, 조각품 등이 빛을 보게 되어 우리는 이들 국가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이들을 다루는 성경상의 진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X. 고대 바사의 부활

 고대 바사는 성경 독자들에게 큰 관심거리이다. 왜냐하면 유다의 포로 후기 역사와 관련하여 당시의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바사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회복시키는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엘람인들의 수도인 수사는 수산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이곳의 궁전에서 왕비 에스더는 민족 말살 기도를 봉쇄하고 자기 민족을 구원하였다. 수사에 대한 발굴은 1885년에 될라퐈 가족(the Dieulafoys)에 의해 시작된 이래 간헐적으로 여러 고고학자들의 지휘하에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중요한 함무라비법전이 발견된 곳은 다름 아닌 수사 궁전의 폐허이다(이 사항에 대해서는 본 논문의 제Ⅴ항과 출애굽기 21장 말미에 있는 추가 설명에 수록되어 있다). 수사를 발굴함으로 얻게 된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그 궁전의 배치 형태가 에스더서에 나타난 것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궁전과 그 구분된 곳, 궁정 의식 등에 정통한 사람만이 에스더서를 기록할 수 있었다고 저명한 학자들이 인정하게 되었다.
 1931년부터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시카고 대학교의 동방학회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를 발굴하였다. 이 발굴 작업의 최초 책임자는 에른스트 헤르츠펠트(Ernst Herzfeld)였으며, 후에 에리히 쉬미트(Erich Schmidt)가 계승하였다. 엄청난 수의 유물들이 나와서 대왕 다리오,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다) 등 성경 독자에게 친숙한 인물들의 시대에 그들이 누렸던 평화와 전쟁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엘람인들의 설형 문자로 기록된 수천 개의 행정 문서 점토판은 바사 제국이 고도의 능률적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데, 바로 이러한 체제하에서 스룹바벨, 모르드개, 에스라, 느헤미야 등이 일했다.
 고대 바사 제국의 기타 지역에서도 중요한 것들이 발견되었지만, 그것들만으로는 이 중요한 국가의 역사적 공백기를 메울 수 없다. 이 지역에서 고대의 다른 국가들만큼 그 역사를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ⅩⅠ. 고대 아라비아의 부활

 많은 학자들이 문명의 요람으로 생각하는 아라비아는 회교도들의 광적인 배타성 때문에 탐험가들에게는 다소 폐쇄된 사회였다. 이곳의 고대 유적지 발굴 작업은 근동의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결코 그 중요성에 있어서 뒤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라비아 민족은 주변 국가들과 많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1762년 첫 탐사는 대참사로 끝났지만 당시 유일한 생존자 카르스텐 니부르(Carsten Niebuhr)는 모하메드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수많은 명각의 사본들을 가져왔다. 이들 명각의 문자를 당시에는 휘미아리트(Hymiarite)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문자는 1841년에 게세니우스(Gesenius)와 뢰디거(Ro..diger)가 해독하였다. 이때부터 고대 아라비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풍부하게 알게 되었다. 조셉 알레비(Joseph Hale’?vy)는 거의 600개 이상의 명각을 가져왔고 에드워드 글라서(Edward Glaser)는 다시 1,000개 정도를 나르는 데 성공하였다(1882~1894년). 더욱 많은 수효가 더해져 이슬람 이전 시대의 아라비아 명각으로 알려진 이들의 수는 5,000개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비록 가장 오래된 명각이라 해도 BC 8세기를 넘지 않지만 이것들은 수많은 성경 용어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에 표현된 종교적 개념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의 히브리 원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아라비아의 땅을 최초로 파헤친 발굴 작업은 1928년에 이뤄졌고. 이때에 거둔 결과는 지극히 빈약하였으나, 1950년에는 웬델 필립스(Wendell Phillips)의 지휘 아래 고고학자 W. F. 올브라이트와 함께 대규모 발굴 작업이 아라비아 남부의 카타반(Qataban)에서 시작되었다. 1951년에 웬델 필립스는 유능한 학자들과 함께 예멘의 마리브(Marib)를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솔로몬왕을 방문한 것으로 유명한 스바 여왕의 수도였다. 마리브는 오랫동안 금단의 지역이었으며 따라서 1951년까지 이곳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수효는 메카를 방문한 사람들의 수효보다도 적었다. 마리브에는 인상깊게 폐허화된 고대 건물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학자들은 이 유적지를 과학적으로 발굴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 이유로 시바 여왕의 수도를 발굴할 수 있다는 허가 소식이 전해지자 학자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발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방관리의 적대감 때문에 그들은 1952년 2월에 황급히 철수해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단기간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있었다. 발굴단은 명각 사본을 많이 얻게 되어 월신(月神)의 고대 사당을 재구성하여 모습을 드러내도록 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이뤄진 이곳의 발굴 소식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도들의 입맛을 자극하였으며 중단된 작업이 하루 속히 재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문헌
 여기에 수록한 서적들은 사실적인 정보를 얻는 데 가치가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과 관련하여 고고학적 증거들을 해석한 부분은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저자들이 근대주의 사조에 다소간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고고학 분야에서 좀 더 오래된 서적들은 시대에 매우 뒤떨어진 것이 보통이며, 또한 내용을 신뢰하기도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새로운 자료들이 나와서 이전에 오해했던 수많은 요점들을 명확하게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Albright, William Foxwell. Archeology and the Religion of Israel (5th ed.). Baltimore: The Johns Hopkins Press, 1956. 이스라엘 주변 민족의 종교관념과 종교관습을 이스라엘의 것과 비교 연구하는 데 특별히 도움이 되는 책이다.
 _______.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2nd ed.). Garden City, N.Y.: Doubleday, 1957. 고고학적 발굴물들을 총괄하여 다룬 책으로 아주 흥미롭고 권위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고고학적 발굴물들이 고대사 전반에 대하여, 특히 이스라엘 역사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_______. The Archeology of Palestine (rev. ed.). Baltimore: Penguin Books, 1960. 75 년간에 걸친 팔레스타인 발굴 결과를 화보와 함께 수록한 책이다.
 The Bible and the Ancient Near East. Edited by G. Ernest Wright. Garden City, N.Y.:Doubleday, 1965.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를 기념하는 논문집으로, 이 책에서 전문가들은 구약성경의 히브리인들과 기타 민족들의 문학, 역사, 고고학, 문화 등 다방면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The Biblical Archaeologist. Published by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126 Inman St., Cambridge, Mass. 02139, 1938년부터 계속 발행되고 있고, 근래에 Near Eastern Archaelogy 라는 이름으로 바꾼 이 계간지는 성경을 뒷받침하는 신뢰할 만한 최신 자료를 제공한다. 이런 유형의 고고학 분야 정기 간행물로는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다.
 The Biblical Archaeologist Reader. 3 vols. Garden City, N.Y.: Doubleday, 1961~1970. 이 책은 30 년간에 걸쳐 성경 고고학자들이 내놓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기사들을 제공하고 있다(only vol. 3 remained in print in 1974.).
 Cross Frank M., Jr. The Ancient Library of Qumran and Modern Biblical Studies (rev. ed.). Garden City, N.Y.: Doubleday, 1958. 사해 필사본을 발견한 후 20 년간에 걸쳐 연구한 결과를 개관한 책으로 신뢰할 만하다.
 De Vaux, Roland. Ancient Israel. Translated by John McHugh New York: McGraw-Hill, 1961. 성경 속의 기사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엮은 책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사회, 시민, 군사, 종교 제도 등을 주변 국가들의 것과 비교하여 다룬 연구서이다.
 Edwards, I. E. The Pyramids of Egypt. Baltimore: Penguin Books, 1961. 애굽인들의 피라미드와 그 건축법의 발전 모습을 뛰어나게 잘 개관한 책이다.
 Everyday Life in Bible Times. Washington: National Geographic Society, 1968. 애굽, 메소보다미아, 팔레스타인, 기타 지역의 전문가들이 쓴 기사들을 고대 유물들을 포함한 여러 컬러 사진과 함께 수록한 책이다. 발행 6년 만에 50만 부 이상 팔렸다.
 Finegan, Jack. Light From the Ancient Past (2nd ed.).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2 vols. 고고학적 발견들을 통하여 고대사를 믿음직스럽게 조명한 책이다.
 Hilprecht, Herman V., ed. Explorations in Bible Lands During the 19th Century. Philadelphia: A. J. Holman and company, 1903. 809. 19세기 동안에 동양학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룩한 고고학적 업적들을 훌륭하게 개관한 책이다.
 Pritchard, James B., ed. The Ancient Near East in Pictures (2nd ed.).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고대 근동 생활의 회화적 증거를 제공하는 고대 기념비들과 기타 고고학적 발견물들의 사진을 수록한 책이다.
 ______,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3rd ed.). 구약성경과 어떤 면으로든 관계가 있는 고대의 애굽, 수메르, 앗수르-바벨론, 헷, 수리아-팔레스타인 문헌들을 담은 책이다.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미국인 학자들이 영어로 번역하였다(본서와 앞의 책을 한 권으로 묶어서 The Ancient Near East: An Anthology of Texts and Pictures라는 책으로 발행하였다).
 The 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le (rev. ed.). Edited by G. Ernest Wright and Floyd V. Filson, with and Introductory Article by W. F. Albright.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56. 130. 33개의 컬러 지도와 88개의 그림이 수록된 책.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성경 지도로서 독자에게 성지를 잘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성경 역사를 조명하는 고고학적 발견들을 잘 제시하고 있다.
 Wright, G. Ernest. Biblical Archaeology (rev. e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3.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고고학 전반을 개관한 책으로서, 권위와 참신성을 겸비한 읽을 만한 책이다. 성경 기사의 역사적 순서를 따라서 성경에 빛을 비춰 주는 다양한 발견들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출처: www.3ams.com